each and every,

[BOOK]함께 걷는 이 길이 끝나면...「밤의 피크닉」 by 온다 리쿠

서재
밤의 피크닉 - 8점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북폴리오

"그러니까 말이지, 타이밍이야."
시노부는 나직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빨리 훌륭한 어른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고 싶다,홀로서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건 잘 알아.굳이 잡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아프리만큼 알지만 말이야.물론 너의 그런 점,나는 존경하기도 해.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거야.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때가 있는 거야.네게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p156-


모두 함께 밤에 걷는다.단지 그것 뿐인데 말야.
어째서 그것 뿐인 것이, 이렇게 특별한 걸까.

돌이켜보면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인것만 같은데,벌써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것에 문득 놀라곤 합니다.그 때의 저는 어땠었냐면, 상당히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잡음이 들리지 않도록 완벽히 방음된 환경에서 다만 앞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오르고,올라서,그 다음에는?
나는 지금도 여기 분명히 살아있는데,웃고 떠들고 고민하고 한숨쉬는 10대의 내 인생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나의 진정한 인생의 시작은 대학 입학 이후라고 말하는 듯한 주위의 시선과 그에 동조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 의연한 척 앉아 있는 것이 내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습니다.물론, 그 와중에도 즐겁고 신나는 일은 가득 있어서 지금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온통 빛으로 가득찬 듯한 이미지로 모든 풍경이 특별히 제작된 물감으로 그린 듯 선명하고 또렷한 광채를 뿜는 듯한 장면이 하나씩 떠오르지만 말입니다.그래도 저는 이 책,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읽고, 아아 이 책을 좀더 빨리 읽었더라면..하다못해 대학 신입생 시절에라도 읽었더라면,하고 마음 깊이 후회했습니다.그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아마도 좀더 너그러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쯤 용서해 줄 수 있었을 것 같은 기분.

힘들다.멈추고 싶다.걷고 싶다.
머릿 속으로 외친다.아니, 외친다느니 하는 기세 좋은 것이 아니라,그저 고장 난 레코드처럼 저주가 되풀이 하여 울리고 있다고 하는 쪽이 옳다.몸은 이미 옛날 부터 죽는 소리를 하고 있다.평소의 기준으로 말하면 완전히 은퇴한 상태인데,지금은 타성과 체념으로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잠깐의 수면으로 체력이 돌아올리도 없으려니와,수면은 피로를 마비시켜 아직 괜찮다고 믿도록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건,계속 되지 않는다.
다리는 무거워서 조금도 올라가지 않는다.간신히 앞으로 내밀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고통과도 비슷한 피로가 전신에 둔하게 울린다.
-p246-

그러고보니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은 후 1년 쯤 후에,이와 상당히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입사 후에 이어지는 타이트한 스케쥴의 교육,그리고 그,제겐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연수 마지막 주의 50km 행군.
사실대로 말하자면,저의 느긋한 성격치고는 꽤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온 회사였지만 연수원에서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해,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슷한 학습내용,앵무새같은 이상론,조직이 원하는 몰개성한 구성원..에 질려 정말이지 오늘에야말로 뛰쳐나가겠다고 이를 악물던 무렵이었습니다.그래도 책에서 읽은 '밤새 걷기'를 타의로라도 해보게 되었다는 것에 나름 의미를 부여하고,조금 떨리는 마음도 있었지요.
배운대로 양말을 겹쳐 신고,잘 길들인 등산화를 단단히 매면서 생각했습니다.그저 한걸음,한 발씩 내딛고 내딛다 보면 다시 돌아오겠지.나의 한 걸음이 50km로 뻗어나가는 거야.고작 그것 뿐인걸.밤이 길다고 겁먹지 말자.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을거야-
물론,괜찮지 않았습니다.
오후 3시쯤 출발한 행군이 밤 12시를 넘어가면서 딱 맞는 등산화 안에서 발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오르고,여기저기 물집이 생기고,다리를 들어올리는 것 조차 고역이라 '아아,인간이 다리를 굽히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동물이었으면!'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습니다.조원들이 돌아가며 부축해 주었지만 이게 끝인가.여기서 포기할까.하지만 그럴 수 없는데-라는 의지와 포기하는 심정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 발걸음을 흔들리게 하고,이제 끝이다,싶을 때 쯤 다시 나타난 연수원의 풍경에 기어이 뿌옇게 흐려지던 시야.이런 것들이 저의 '밤새 걷기'에 대한 기억입니다.아마,'밤의 피크닉'속의 그들과 고통의 차이는 거의 없었겠지만,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약 내가 3년을 함께 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했더라면 그 날에 대한 나의 기억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좀더 많은 이야기를,하릴없이 지나쳐가는 일상 속에서는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도 하고,이런 상황에서도 따스한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을텐데.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진 그 밤의 긴 여정 속에서 보았던 고요한 숲의 느낌이나 쏟아질듯한 별빛,그리고 같은 고민을 가진 동기들과의 대화-는 그나마 좋았지만,그래도 더 좋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으로,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립니다.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1미터 걷는 것 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 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분 일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 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농밀하며 눈 깜짝할 사이였던 이번 한 해며,불과 얼마 전 입학한 것 같은 고교 생활이며,어쩌면 앞으로의 일생 역시 그런 '믿을 수 없는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아마 몇 년쯤 흐른 뒤에도 역시 같은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어째서 뒤돌아 보았을 때는 순간인걸까.
그 세월이 정말로 같은 일분 일초마다 전부 연속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하고.

-p224-

돌이켜보면 순간인 것 같다가도,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뒤돌아보면 한없이 아득하기만 한 시절.
오늘의 나도 내일의 어느 순간엔 이렇게 멀고 그리운 존재가 되어있겠지요.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어영부영 부실하게 보내고 만 것에 대한 후회는 들지 않으니 큰 일입니다.
그래도-방음이 잘 된 공간도,깨끗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정원도 좋지만 저는 역시,가끔은 잡음이 끼어드는 생활이 좋습니다.죽을만큼 고민을 하고,수도 없이 한숨을 쉬고,풀 죽은 채로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어깨를 툭 쳐줄 사람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제 삶이란,어쩌면 발바닥을 찌르는 아픔을 참으며 끝도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다카코나 토오루와 다를 바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그 들이 그 길의 끝에서 얻어낸 것을 저도 이 길의 어디에선가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끝까지 품에 안은 채 걸어가고 싶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BOOK] 흑과 다의 환상 by 온다 리쿠

서재
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_리에코
분명히 보리스 비앙의 소설 중 한 구절일 것이다.
'이제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든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잘못은 아닙니다.'
정확한 표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문장이었다.
진실은 어때서 늘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물론 나는 그와 사랑의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었고, 명확하게 장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그를 비난할 권리는 전혀 없다.
기껏해야 오랫동안 내 것이었던 애정의 기득권을 앞으로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정도일까.
비난의 근거는 그 정도일 것이다.
전에는 당신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당신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보다 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죄는 아니다.
어느 말도 죄는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어째서 이렇게 아플까.
어째서 이렇게 가슴을 찢어놓는 말이 죄가 아닐까.


_
_아키히코
시간이란 신기하다.어제나 오늘이 평소의 24시간과 같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회사에 도착해서 전화를 여기저기 걸어대고 있으면 어느새 점심때.
상사와 함께 클라이언트를 한 곳 방문하면 어느새 저녁이다.
야근하면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으면 금새 9시.
식사를 하고 한잔하면서 숨을 돌리면 어느새 다음날이다.
것을 다섯 번 반복하면 금요일 밤이 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보내는 이 시간은 왜 이렇게 길까.
주위에 넘쳐흐르는 녹색의 그러데이션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한다.
육체가 정신의 그룻이라 한다면,정신은 시간의 그룻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_마키오
내가 이른바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남보다 조금 더 주의가 세세하게 미치는 덕에 '친절한'사람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남을 배려할 줄 아는'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교사들에게 '배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서 검은 이물질을 삼킨것 같은 거북함을 느꼈다.
내가 그 말을 나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_세쓰코
점점 빨라져 가는 세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업도 사회도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어제까지 유용하던 것이 오늘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이 전에 비해 훨씬 잦아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들 여유있는 표정으로 걸었는데,
지금은 누구나 뒤처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뛰고 있다.
노인도,어린 아이도 전속력으로 뛰어야 한다.
뛸 수 없는 자는 그저 끽소리 못하고 쓰러져 죽을 수 밖에 없다.
지금 나는 아직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세계의 움직임에 따라 갈 수 있지만,
앞으로 세계가 한 층 더 가속되면 직장인으로서,사회인으로 세계를 따라갈 수 있을까.
누군가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태엽을 감고 있다.
태엽을 감으면 감을 수록 세계는 가속된다.
하지만 그러다가 모든 것이 튕겨져 나가는 날이 올 것이다.
끝까지 감은 태엽이 풀리면서 세계가 튕겨져 나가는 날이.




여행이라는 것은 비일상의 경험을 위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를 옭아맨 모든 것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내가 있어도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낯선 땅에서,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것.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발빠르게 돌아다니는 관광객 식의 여행은 아무래도 나완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내게,
작품속의 동창생 네 사람의 여행은 참으로 이상적인 모범이 되어주었다.

산길을 따라 걸으며 살아오면서 겪은 크고 작은 수수께끼나 미스테리를 해결해보는 일.
그야말로 시간이 남아 돌다못해 흘러넘치는 상태에서만 부려볼 수 있는 사치가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 한 마을의 문패 중 열 일곱개가 갑자기 사라진 일이라던가,
어느 날 아침 운동장에 무거운 책상이 아홉개나 놓여져 있던 것.
그냥 그렇게 넘어갔지만 사실은-이라는 가정으로 시작되는 네 사람의 추리여행은
그래서 부담없고 즐거웠다.
사실 가장 큰 미스테리는 마키오와 리에코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맞닿아 있었지만.
상하권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각 에피소드는 한 사람의 독백 형식으로 되어있어 네 사람 각자의 세상과 서로를 보는 시선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재미있다.아키히코가 보는 마키오의 장점이 마키오 자신은 단점으로 생각한다던가.또한 서로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 이해도가 달라지는 것을 섬세하게 그려내 각 인물에게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다른 온다 리쿠의 작품과는 조금 다르게,주인공들이 다들 직장생활 10년차쯤 되는 30대 후반의 나이이지만-그런만큼 오히려 독자의 현실에 가깝게 다가올 수 있지 않았나-생각해 본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연작 중에서는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

 
신고

오늘의 구매 생활

이것저것 리뷰


온다 리쿠,
좋아하긴 하지만 요샌 너무 물밀듯이 밀려나오는 바람에
조금씩 애정이 식고있는 작가였는데.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7831959&orderClick=LAA


그래도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었나봅니다.
어느새 구매버튼을 클릭하고 있었습니다...;ㅁ;
5000원 할인 쿠폰도 적용할 수 있었단 말이죠-_ㅠ
그래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까지 다시 사버리게 되었습니다만;;
선물하던지 팔던지 해야겠네요.휴~

그래서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으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요번에 지른 책들은

온다 리쿠 세트-삼월은 붉은 구렁을/흑과 다의 환상上,下/황혼의 백합의 뼈
샤바케 1,2
우부메의 여름(이제서야!!)
전쟁의 기술
사람을 얻는 기술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11권
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좀 바쁠 듯 하니,
갖고 다니면서 읽어야겠네요^___^


음,요새는 '친해져야만 하는 사람과 친해지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정말 정말 안 맞는 사람인데,
이해도 안가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인데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그래서 조금 고민입니다_ _)
예전 같으면 쌩까고 제 인생의 테두리 밖으로 쫓아냈겠지만,
이젠 그럴수도 없으니ㅠ

흑,전 어른이 될거에요!!;_;
신고

'이것저것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쾌변엔 차전자피-CJ해우초  (10) 2007.08.27
요즘 나의 완소 아이템!!  (8) 2007.08.20
오늘의 구매 생활  (12) 2007.08.09
쇼핑쇼핑쇼핑  (18) 2007.08.06
Rosehip Tea & Highbos Tea  (15) 2007.06.04

[BOOK] 빛의 제국 by 온다 리쿠

서재
빛의 제국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밤의 피크닉>,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작가 온다 리쿠의 아름다운 판타지, '도코노' 연작의 첫 작품. 방대한 양의 서적을 암기하는 힘, 멀리서 생긴 일을 아는 힘,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힘 등 여러 가지 특이하고 지적인 능력을 지닌 '도코노(常野)' 일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지극히 온후하고 예절을 중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들로,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는 손에 땀을 쥐는 대결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누구나 친근하게 느끼는 배경에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그럼에도 수많은 미스터리 팬들이 걸작이라고 손꼽는 작품이 바로 <빛의 제국>이다.


결론부터 말하면,저는 그저 그랬습니다.
책을 손에 드는 순간,독자를 현실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그녀의 마력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만,흡인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첫번째 이야기인 만큼,많은 인물의 에피소드가 분산되어 진행되기 때문이겠지요.
속세의 인간같지 않은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마찬가지.

  *늘 생각하지만 온다 리쿠의 묘사력은 정말 발군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

   "기모노를 입은 여자를 상상했는데,뜻밖에도 하얀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나타났
    다.어울리지도 않게,치자꽃같은 여자군,하는 생각이 들었다.짧게 자른 머리 밑으로 드러나
    화장기 없는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낭창낭창함과 청결한 아름다움이 감돌고 있었다.
     (......) 그득한 과거와 미래를 방불케 하면서도, 탁하거나 닳아빠진 곳이 전혀 없었다."


온다 리쿠의 작품속에서 약속이나 한듯이 항상 등장하는
청아하면서도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시공간의 여신같은 분위기를 가진 여자,혹은 남자들.
그런 이들의 손에 이끌려 그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왠지 모를 그리움을 갖게 만드는 그 곳을 여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그래서 저는 그녀의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빛의 제국'은 이 한권만 읽기보다는 시리즈 전체를 읽은 후에야 책 한권을 다 읽은 후에 느끼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군요.문득 HEROES가 생각났습니다.매 에피소드마다 능력자가 한명씩 등장하는..

도코노 이야기의 첫번째 작품은 '빛의 제국'은 긴 이야기의 프롤로그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세한 리뷰는 전권을 읽은 후로 미루도록 하지요:)


신고

[BOOK]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by 온다 리쿠

서재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북폴리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내가 소녀였을 적에,
우리는 잿빛 바다에 떠오른 열매였다.

내가 소년이었을 적에,
우리는 막간같은 어두운 물결에
소리도 없이 떠돌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는,
구름과 지평선 사이로 사다리를 오르는 우리가 보인다.
보리의 바다에 빠진 우리의 혼이.

바다에서 돌아온 뱃사람들은,
다시 육지에서 시간의 꽃잎속에 가라앉는다.

바다에서 돌아온 뱃사람들은,
다시 허공에 시간의 꽃잎을 뿌린다.




이 책을 읽다가
예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습니다.

친구들과 초원에 서 있었는데,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저 멀리-
어딘지 가늠할 수도 없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총성의 메아리.
'누군가 총을 쐈구나,살인인가?'하고 생각한 나는
신경쓰지 않고 친구들과의 대화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세 번 그치지 않고 들리는 총성은
조금씩 가까워져 왔습니다.
북쪽에서,서쪽에서
방향은 다르지만 제 가까이로 오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수 있을 만큼
총성은 점차 뚜렷해졌습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해져서
"이거,총소리-?"하고 말하면서 다른 친구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풀썩하고 쓰러지는 그녀와,옷 위로 점점 번져가는 핏자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너머에 있는 건
바로 나를 겨냥한 총구.

'어딘가 멀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총성이라는 '비일상'
사실은 바로 제 옆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이렇듯 독자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가 만든 비일상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도록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어라?'하는 순간,거대한 학원제국에서의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삼월에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삼월의 나라.
원한다면 외국의 유명강사에게서 레슨이나 과외를 받을 수도 있고,
연극 상연을 위해 호화로운 의상과 세트를 지원받을 수도 있으며,
예전 왕궁에서나 열렸을 법한 파티나 무도회가 열리는 이상한 학원.
그렇지만 저는 어느샌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학원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리세의 시선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꼬리를 물고 이어져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음을 알았을 때 경악했고,
사실 자신만이 깨닫지 못했을 뿐,
모든 사건이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음을 알았을 때
뒷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반전보다는 반전에서 드러나는 각 인물들의 행동의 의미가 더 쇼크였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뭔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까페 한 가운데서
저 혼자 이상한 세계에 퐁당 빠졌다가 되돌아온 기분일까요.
왠지 창 밖의 세상이 묘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서점에 갔더니 온다 리쿠의 작품이 좌르륵 진열되어 있더군요.
요새 붐이긴 한가 봅니다~
읽고 싶은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건 좋지만..
조금 섭섭하기도 합니다.
어쩐지 몰래 숨겨둔 비밀장소가 관광지로 개발되는 기분??-_ㅠ(다른가;;)

신고

[BOOK] 삼월은 붉은 구렁을 by 온다 리쿠

서재
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겨우 마지막 장을 덮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봤을 때
그 세상이 너무나 낯설게 보일 때

걸음걸음 쏟아지는 풍경과 소리들에
어느 순간 주의를 기울이면
단어와 음절로 조각조각 흩어져
내가 보는 이 세계가 새로운 책장 속에 녹아들것만 같아
애써 보지도,듣지도 않으려 하면서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총총 걸어가게 되는 일

비현실적인 세계에 홀로 떨어진 앨리스처럼
지나가는 행인들 속에 나 홀로 실체인것 같은 그런 느낌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그랬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즈모야상곡''무지개와 구름과 새와''회전목마'라는 4가지 단편에는
모두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등장합니다만,
이야기마다 존재하지 않거나 쓰여지기 전이거나 존재하거나 합니다.
등장인물들도,실제 인물이거나 그렇지않거나 하겠지요.
하지만 화자들이 말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독자와의 거리는 네 단편을 차례로 읽는 동안
점점 가까워져서,결국 현재 '삼월..'을 쓰고 있는 작가의 시점에 이르면
책을 읽는 '나'와 이야기 속의 '나'그리고 책을 쓰는 '나'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집니다.

내용소개



책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 제 1부의 제목을 듀크 엘링턴의 명곡을 따라 '흑과 다의 환상'이라고 하자.
자,
이런 시작은,어떨까?>

여기에 와서야 독자는,책의 세계에서 억지로 현실로 떠밀리게 됩니다.
'흑과 다의 환상'은,첫번째 단편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있다고 언급되는 첫번째 단편이기 때문입니다.
즉,책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죠..아쉽게도.

자세한 내용은 저도 아직 헷갈리기 때문에 생략하겠지만-
작가도 분명히 독서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있었던 것이다.그 책이.
대단히 매력적인,한번 읽기 시작하면 다 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이.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고,언제까지고 게속될것 같은 착각이 들게하는 책이.
언젠가,언젠가 꼭 그 책을 읽고 싶다.
그 붉은 표지의 책을 손에 들고,자기방 책장에 늘어세워보고싶다.
언젠가 꼭.>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가,
그 책을 손에 놓기가 너무나 아쉬워서-
이 버스가,영원히 달려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을 만나는 것.
그런 책을 만나게 되는 행운이 있을 때마다,
독서 애호가(?)가 된 것이 기뻐요-'ㅂ'
저같은 경우는 북 컬렉터에 가깝지만 말이죠;;

어쨌거나 이 책에 언급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단편..
'흑과 다의 환상'과 후속편인 '황혼의 백합의 뼈'가 출판된다고 하니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그전에 광골을 사야한다는 압박이ㅠ


덧)확실히 개인의 독서기록 도서관이 있으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읽은 책이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는 책장앞에서 '그래,이땐 SF만 읽었었지'라던가
'이때는 환타지만 읽었군'이라던가'마케팅에 관심을 가진 시점이 여기던가'같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요..
...집이 커야 겠군요.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