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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해당되는 글 100건

  1. [BOOK] 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2. [Bookmark] 다상담 1 / 강신주 (2)
  3. [Bookmark]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4. [Bookmar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2)
  5. [Bookmark]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6. [BOOK] 투명한 색채로 물든 삶의 궤적,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y 무라카미 하루키
  7. [BOOK] 끝없는 삶과 관계의 기록, <와일드 Wild>by 셰릴 스트레이드 (2)
  8. [BOOK] 구름배 같은 집에 담긴 900일 간의 기록. <제가 살고 싶은 집은...>
  9. [BOOK] 죽음을 기억하라 - <메멘토 모리> by 후지와라 신야
  10. [BOOK] 어느 순간 굴러 떨어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by 전민식
  11. [BOOK] 그들이 가야할 곳은 어디에- <언더그라운드 2: 약속된 장소에서> by 무라카미 하루키
  12. [BOOK] 영혼이 없어도, 아름다운 날들이면 되잖아? <나를 보내지 마> by 가즈오 이시구로
  13. [BOOK] 기나긴 밤이 빛의 바다로 침몰하는 순간, <7년의 밤> by 정유정 (2)
  14. [BOOK]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것,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by 다우어 드라이스마
  15. [BOOK]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by 무라카미 하루키
  16. [BOOK] 이해할 수 없는 인간 행동의 비밀, <행동 경제학> by 도모노 노리오 (6)
  17. [BOOK] 그 대통령의 비밀스러운 사생활,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
  18. [BOOK] 일상과 여행 사이의 기록, <가만히 거닐다> by 전소연 (2)
  19. [BOOK] 동양과 서양,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화의 차이-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2)
  20. [BOOK]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by 더글러스 애덤스 (4)
  21. [BOOK] 휴일에 읽을만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무덤으로 향하다」 by 로렌스 블록 (5)
  22. [BOOK]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철학 이야기, <철학까페에서 문학 읽기> by 김용규 (2)
  23. [BOOK] 세 번째 소년의 이야기 - 「나......의 아름다운......정원」 by 심윤경
  24. [BOOK] 보통의 존재 by 이석원 (5)
  25. [BOOK] 강 너머가 아닌, 이 자리의 희망- 「공무도하 公無渡河」by 김훈 (2)
  26. [BOOK] 그저,사랑이라는데-「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by 박민규 (13)
  27. [BOOK] 그의 행복엔 이유가 있다 -「땡큐! 스타벅스」by 마이클 게이츠 (3)
  28. [BOOK]함께 걷는 이 길이 끝나면...「밤의 피크닉」 by 온다 리쿠 (4)
  29. [BOOK]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안녕,고양이는 고마웠어요」 (6)
  30. [BOOK]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발자욱-「무지개」by 요시모토 바나나 (9)

[BOOK] 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서재
미스터 하이든 - 8점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북폴리오

 

그 날은 아침부터 뭔가 이상했다.

지난 주 까지의 폭염이 무색하게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 때문인지. 혹은 간만에 하릴없이 보낼 수 있는 하루가 통째로 생겼기 때문인지.

눈을 뜨고 마주한 현실이 문득 생경해서 요거트를 만들다 바닥에 흘리고, 식수용 보리차가 가스렌지 위에서 끓다 못해 흘러 넘치는 광경을 그냥 멍하니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뛰고 온 다음 샤워를 하고,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사샤 아랑고'미스터 하이든' 펼쳤다.

 

*주의* 아래부터 소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헨리 하이든은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처녀작인 [프랭크 엘리스]는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가 팔려나갔고, 8년이 지난 후 그는 모든 걸 가진 남자가 되어있었다.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 수많은 문학상의 수상자, 우아한 귀족 저택과 마세라티의 주인, 아름다운 아내의 남편.

그리고 귀여운 금발머리 편집장의 내연남.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내연녀 베티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아내 마르타와 이혼한 다음, 그녀- 베티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살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오는 그의 마음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마르타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세상에는 헨리의 작품으로 알려진 모든 소설을 직접 쓴 장본인이었다.

 

그 후로 사건은 예상할 법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대답을 생각해 놔야 겠군. 헨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대면하기 위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자 빗속에  베티가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표정은 진지했다.

트렌치 코트 속에는 체크무늬 투피스를 입고 있었고 금발을 높이 틀어올린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가 틀어올린 머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건강미가 넘쳤고 그에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헨리, 부인이 다 알고 있어요."

 

 

의도된 살인, 예기치 않은 실수, 뜻밖의 인물, 운명의 장난...

이 모든 요소들이 교묘하게 조합된 끝에 결국 미스터 하이든의 인생은 파국을 맞이한다.

 

헨리 하이든은 결국 어떤 인간이었을까?

그를 줄곧 쫓아 온 파시의 기억 속의 그는 포악한 맹수이자, 자비없는 범죄자였다.

실제로 기스베르트 파시가 헨리를 처음 만난 성 레나타 보육원에서, 헨리는 자기가 2층 침대에서 자고싶다는 이유로 파시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다시 만난 그는 파시를 끔찍한 사고로부터 구했고, 심지어 자신의 사비를 들여 특실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헨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잔혹한 계획이 들어있었고, 그것  중 일부는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생선 가게의 세르비아인-오브라딘에게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오브라딘의 가게가 어려워지자 그의 아내에게 몰래 돈을 쥐어주기도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일부나마 털어놓기도 한다. 

어떠면 그런 인간적인 모습 조차 헨리에게는 일종의 연극이었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오브라딘에게 만큼은 그렇게 보이고 싶었기에 그런 연극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르타 하이든은, 사실은 살아있었던 걸까?

헨리 하이든은 어디로 간걸까?

그는 왜 옌센 형사와 함께 부모님과 살던 옛 집에 찾아간걸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마르타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당신을 타락으로 몰아넣든, 당신이 무엇을 사랑하든, 나는 당신의 광기 바깥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보호해 주었고 이해해 주었고 내가 나 자신으로서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마음속 악령과의 음침한 만남에 서둘러 가느라 이 훌륭한 결말을 내던졌어요.

내가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모리아니 대표님께 보낼게요.

 

사랑하는 아내 마르타 드림.

책을 덮고 나니-

어쩌면 이 소설은 스릴러가 아니라, 진정한 로맨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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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 다상담 1 /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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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담. 1: 사랑 몸 고독

저자
강신주 지음
출판사
동녘 | 2013-08-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삶에 지친 당신에게 바치는 강신주의 돌직구 상담!철학자 강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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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느끼는 고독의 정체는 바로 그거에요. 몰입할게 없는겁니다. 이렇게 표현할수도 있죠. 사랑하는 게 없다고요. 밤새도록 함께 있어도 시간이 가는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고독하지'를 묻지말고, 이렇게 되묻는 게 좋아요. '언제부터 세상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았을까?'라고요. 세상이 풍경으로 보일 때, 우리는 고독해요.

-p178


다음 날의 출근을 위해 나를 위한 일들조차 습관처럼 포기하는 요즘의 나는,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몰입이란 뭘까.
세상의 시선과, 나 자신의 에고에서 눈을 돌리고 어떤 대상에 완전히 빠진다면 

나의 삶은, 언젠가의 그 날처럼 또 다시 빛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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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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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저자
프리모 레비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07-01-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아우슈비츠를 통해 인간성의 한계를 성찰한 현대증언문학의 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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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p17-


아우슈비츠, 라고 하면 늘상 지치고 앙상한 사람들과 가스실, 강제 노동..같은 이미지를 떠올렸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그 자리에서 그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그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점점 무너져가는 자신을 자기 스스로의 눈으로 관찰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지.

미디어라는 필터는 당대의 현실을 매끈한 유리조각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사자로서의 현실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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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서재/북마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저자
줄리언 반스 지음
출판사
다산책방 | 2012-03-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1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 맨부커상 수상작! 영국 문학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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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건 아니죠.(..)"               -p26-

거대한 사건에 있어서 나의 물리적인 책임은 단지 두 팔을 뻗어 닿는 거리만큼만이었다고 해도, 한 사슬과 다른 사슬을 내가 연결했다는 사실은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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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서재/북마크



밤이 선생이다

저자
황현산 지음
출판사
난다 | 2013-06-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황현산, 이라는 이름이 있다…… 어쩌면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것만 같다."

                                                                                                                                                              -p12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 이란 구절이 와닿는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조언이 내게 다소 공허하게 들렸던 이유는 , 단지 이 자리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기엔 '내버려둘 수 없는' 것들이 내게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안단테 안단테한 속도로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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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투명한 색채로 물든 삶의 궤적,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y 무라카미 하루키

서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8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민음사

 

 

나는 어쩌면 영원히 가짜에 머물지도 몰라,라는 초조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사실 나는 꽤나 여러번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는 무엇인지,

다들 착착 자기 자리를 알아서 찾아가는데, 나는 왜 아직도 헤매고 있는건지 항상 고민하고 불안해 했다.

몇년이고 노력해서 겨우 손에 닿을락 말락한 지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제 겨우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볼 때면 더욱.

나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결국 누군가의 대체품이나 모조품으로만 기능하다가

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어쩌면, 네 명의 친구들 사이에서 다자키 쓰쿠루가 느낀 감정도 그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성에 색깔이 들어가 있지 않다, 는 것은 언뜻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묘하게도 그와 나머지 네 사람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만일 내게도 색깔이 있는 이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하고.

 

쓰쿠루는 가끔 자신이 왜 이 친구들 그룹에 속하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진정 내가 이 친구들에게 필요한 존재일까? 오히려 내가 없으면 나머지 네 친구는 더 자유롭고 즐겁게 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다들 아직 그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뿐이 아닐까? 그걸 깨닫는 건 시간 문제 아닐까? 생각할 수록 쓰쿠루는 혼란스러웠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가늠하는 일이란 마치 단위가 없는 물질을 계량하는 것과 같았다. 저울의 바늘이 지잉 소리를 내며 딱 한군데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늦게 순례를 떠나게 된 것은 마음 한 구석에 자신은 그 그룹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유도 모르고 내쳐져 죽을만큼 괴로워하면서도 왜? 냐고는 묻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당연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는 치유인 동시에 저항이자, 독립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처벌에 대해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것은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객체로 마주선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순례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난 후에야 그는 한 그룹에 속하고 싶었던, 그러나 속하지 못했던 미숙아가 아니라 역을 좋아하고 반듯하며 어머니 팬이 많았던 다자키 쓰쿠루로서 그들을 마주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사는 방식은 아마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텅 빈 그릇 같은 것.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음식을 돋보이게 해주는, 질박한 멋이 있는 그릇.

건물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오고 나가는 열차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역.

색채가 없어도-색채가 없기에 오히려, 어떤 색이든 돋보이게 해주는 마법.

 

인생의 목표를 정해라,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외쳐대는 요즘이지만, 뭐 어떠려나.

 

그런, 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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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끝없는 삶과 관계의 기록, <와일드 Wild>by 셰릴 스트레이드

서재
와일드 - 10점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나무의철학


종종 삶이 맘 같이 풀리지 않거나, 또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나 자신은 답답할 때면 그런 생각을 한다.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 만으로 나를 둘러싼 이 세계에서 떠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끊임없이 두 발을 움직여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간다면, 그 곳에 도착하는 순간 나 자신이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 <와일드 wild> 의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도 어쩌면 그런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한꺼번에 밀어닥친 불행은 26세의 그녀가 감당하기는 너무 버거웠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되살아나는 아버지의 기억, 그리고 마약, 외도, 이혼...

자꾸만 자신의 삶을 파멸로 밀어넣으려는 자기자신과 맞서기 위해 셰릴이 선택한 것은,

그저 한없이 걷는 것이었다.

걷고

걷고

걷고

걷다보면 언젠가 도달할 목적지를 향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산맥과 사막, 황무지로 이루어진 4,285km의 그 길은 그녀를 불가사의한 힘으로 끌어당겼고,

태어나서 제대로 운동을 해본 적도 없던 셰릴은 자신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사실, 이 책의 대부분은 셰릴이 걷는 여정에서 겪은 고통과 그 와중에 느끼고 생각한 것들, 그리고 만난 사람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지루할만큼 끝없이 걷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고민을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시기에 가장 심각한 강도로 겪고있는 한 여성이 

길 위에서의 만남에 의해 어떻게 치유되어 가는 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셰릴의 시선을 빌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걸으면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에는 무조건적으로 나에게 무한한 애정을 베풀어 줄, 그런 사람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다음에는 길 위에서 허덕이는 나의 짐을 덜어주고 때로는 쉬어도 좋다고 다독여줄 사람을 생각했다. 

아주, 큰 사람 말이다.


그런데 몇 번인가의 만남과 이별을 겪고 나니..

사람들은 그냥 다 비슷한 고민과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비록 많이 가진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나름의 번뇌가 있고 자신이 짊어진 인생의 무게를 힘겹게 받치고 있었다. 

조금 더 깊게 고민하고, 조금 더 현명해진 사람은 있어도, 그들 역시 각자의 짐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을 쉽게 살 수 있게 해줄 아주 큰 사람은, 그런 사람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누군가를 만나 감정을 나누고 미래를 얘기하는 건 불필요한 일일까?

어차피 혼자 걸어가야 하는 여정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혼자여도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닐까?


셰릴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비록 혼자서 견디기 버거운 짐을 지고 나선 길이지만, 길 위에서의 만남은 좀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길 중간 중간에서의 그런 만남이 없었다면 진즉에 포기하고 돌아섰을 길을, 

조금 더 가면 누군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이 길 어딘가에 나와 함께 인생의 몇 시간이나마 함께 했던 인연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신발끈을 동여맬 수 있게 해 준다고.

그러니까 비록 상처가 늘어갈 뿐인 길이라도, 유쾌하지만은 않은 만남이었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동반자 (Companion)"


각자 다른 과거와 사연을 갖고 떠나온 길일 지라도, 

외모와 말과 생각이 달라도 서로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같이 걷는 동행.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인연과 함께 한 시간과 추억이 있다면 내 삶의 여정도 조금쯤은 더 즐거울 지도 모른다. 


언젠가 맘 맞는 이와 함께 제주도 해안을 자전거로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바람은 거칠고 볕은 따갑겠지만, 

함께 같은 길 위에서 같은 바람을 맞으며 달렸던 기억이 조그만 불씨로 남아 나의 일상에 작은 온기를 전해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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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구름배 같은 집에 담긴 900일 간의 기록.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서재
제가 살고 싶은 집은 - 10점
이일훈.송승훈 지음, 신승은 그림, 진효숙 사진/서해문집

 

 

건축주가 말한다.

 

  "이일훈 선생님, 선생님과 집을 짓고 싶습니다."

 

건축가가 말한다.

 

  "좋습니다. 송승훈 선생님.

  그럼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송선생님은 어떤 집을 꿈.꾸고 계신가요?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나요?

 

 

낡은 책과 다듬지 않은 돌로 지은 집, 「잔서완석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라는 이 책이 참 좋다.

건축가와 건축주, 일로 만난 사이지만 스무 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들의 편지가 정겹고,

읽는 사람의 찾는 수고를 덜어주는 참고 사진과

흐트러진 스케치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춰나가는 도면도 마냥 신기하다.

 

집주인, 국어선생 송승훈이 살고 싶은 집은 이랬다.

 

땅의 바람길을 아는 집이면 좋겠습니다.

 

구름배 같으면 좋겠습니다.

구름이 부드럽게 감싸안고 공기 잘 통하는 하늘로 사람을 두둥실 띄워가는 듯 편안한 방이길 꿈꿉니다.

 

집 분위기는 이웃에 위세 부리지 않고, 주변을 비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마당에는 파라솔이 있기 보다는 궁둥이 대고 쭈그려 앉을 수 있는 돌멩이나 나무 의자가 있으면 예쁘겠습니다. 

 

종종 부잣집에서 만나는 얇고 뾰족한 철기둥이 세워진 대문은 아니면 좋겠습니다.

어깨에 힘 딱주고 버티는 모양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찾아오는 이와 막걸리 한잔 마실 수 있는 자리로 툇마루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칠 때 방에서 나와 바깥바람 쐬며 누워서 낮잠자기도 하고요.

 

꾸미는 장식이 적어도 질박한 멋을 바랍니다. 그렇다고 매끈한 표면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비가 들이치면 막아서 편하게 창문 열어둘 수 있고, 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면 볕을 가려서 시원한 처마가 길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복도는 한공간과 다른 공간을 이어주면서, 그 과정에서 어떤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때로 멈추어 서거나 주저앉아서 무엇인가를 할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면 좋습니다.

 

책장은 번듯하지 않아도 책이 들어가기만 하면 좋습니다. 자유롭게 집 구석구석에 적응해서 책장이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글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치 시와도 같아서

읽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정말 구름배를 탄 것마냥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에 화답하는 건축가 이일훈의 글 또한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서 연륜이 묻어나고.

건축주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피력한 후에도 조심히 건축가의 의견을 구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건축가 또한 건축주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이 필요할 때는 가감없이 덧붙이며,

어디어디를 둘러보면 더 좋을 거라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일로 만난 사이라기 보다, 좋은 사제 지간이나 인생의 선후배 같은 모습이 보기 좋다.

 

그래서일까.

완성된 집은 집주인의 품성 그대로,

'이웃에 알맞게 열려 있어서 그네들이 다가오려 할 때 덜 머쓱한' 구름배 같은 집이 되었다.

시멘트로 지은 한옥이라기엔 너무도 포근하고, 때로는 장난꾸러기 같고, 때로는 엄격한 스승같은 얼굴의 잔서완석루.

 

사실, 나는 한번도 집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빛과 바람이 알맞게 통하는

시원한 툇마루와 마당이 있는

집안 구석구석 책장이 어우러진

내가 살아가고픈 모습을 닮은, 그런 집이 있다면 좋지않을까하고. 조금은 부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집주인 송승훈 씨의 마지막 글귀가 마음을 울린다.

 

할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고 저는 늘 생각하고 삽니다.

꿈은 몸을 긴장시키는 무엇이고, 그러기에 꿈꾸기를 잊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삶은 달라지겠지요.


되는 만큼만 해주십시오. 저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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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죽음을 기억하라 - <메멘토 모리> by 후지와라 신야

서재

메멘토 모리 - 8점
후지와라 신야 지음, 양억관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요즘은 이래저래 살아 있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똑같지는 않지만, 거대한 프로젝트의 1/100 정도를 매일매일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기분이다.

하루에 그만큼 밖에 못하다니, 내 능력이 이것 뿐인가..하고 의기소침해지다가도

이것밖에 못하게 만든 환경에 불끈 화가 나다가도

돌아갈 곳이나 떠나갈 곳에 대해 생각을 하곤 한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내가 진정 있어야 할 곳이 있진 않을까..하고.

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튼, 산다는 건 대체 무엇인지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되는지

이런 삶의 방식이 맞는 건지 계속 고민하던 중에

다시금 이 책을 펼쳐 들었다.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다

문득, 한 구절에 눈길이 머문다.

 

 

 

「이런데서 죽고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풍경이

   한순간 눈 앞을 스칠 때가 있다.」

 

 

 

소담한 논밭, 야트막한 언덕, 짚으로 얼기설기 이어만든 지붕이 있는 집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황금빛 풍경이 담긴, 사진 위의 한 문장.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른다면,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하면 되지 않을까,하고.

 

 

어떤 풍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떤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지

 

 

어쩌면 그것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내 삶의 방향은 쉽게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잠깐 생각해봤지만

가능하다면 빌딩숲이 아니라 진짜 숲이 있는 곳에서

아늑한, 내 방안 가득히 내리쬐는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조용히 ..그런 방식이라면 좋겠다.

 

나의 죽음이 그렇게 기억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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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어느 순간 굴러 떨어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by 전민식

서재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6점
전민식 지음/은행나무

 

전화 한 놈이 말은 그렇게 해도

어쩌면 자넬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이건 내 짐작인데

그 녀석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자네뿐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우린 대역이 전문이잖아.

가끔은 돈 안 받고도 일해줄 수도 있지. 안 그래?

 

 그보단 누군가 자네를 향해 손을 내밀 때마다

자꾸 외면하는 건 좋지 않아.

세상에 대해 무뚝뚝해지는 건

사는 것에 권태를 느낀다는 거고,

그건 결국 자신의 목을 죄는 독이기도 해.

 

누가 손을 내밀면, 잡아줘.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만약, 내가 지금 있는 위치에서, 일상에서,

어느 순간의 사건으로 굴러떨어져버린다면?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게 된다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임도랑이 그랬다.

그가 사랑하던 여자는 사실 산업 스파이였다.

그는 그녀에게 회사의 중요한 비밀을 알려 주었고, 그래서 그녀가 자취를 감춘 후 해고를 당한다.

중요한 기밀을 스파이에게 넘긴 사람을 직원으로 쓰고 싶은 기업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그는 개를 산책시키는 일과, 그릇을 닦는 일을 시작했다.

작은 쪽방에서, 가끔은 대역 알바도 하면서.

 

이 작품 자체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설명조의 문장이 많고,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은 큰 개연성 없이 투박하게 맞물려있다.

게다가 결말도, 소설의 재미를 이끌어온 소소한 장치들을 한꺼번에 망가뜨리는 식으로 전개된다.

어쩌면 장편 소설이 아니라 옴니버스 식 단편으로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순전히 저 위의 대사 때문이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 잡아주라는.

'재미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요즘은

가끔 멍하니, 언젠가 나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는 모든 끈 들을 놓아버릴 날이 올까..하고 생각했는데

그냥 어쩌면, 나는 현실에 묶여 있는게 아니라

세상이 내가 내민 손을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고 표현했지만,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임도랑이라는 캐릭터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추락한 케이스에 더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주위의 사람들을 보는 시선에서는 어색함이나 거북함보다는

왠지 오랜만에 만난 동료를 보는 듯한 따스함이 느껴진다.

드디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수 있게 되었다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내가 그의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문득, 겪어 본 적 없는 지금 과는 다른 일상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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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그들이 가야할 곳은 어디에- <언더그라운드 2: 약속된 장소에서> by 무라카미 하루키

서재
약속된 장소에서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문학동네

 

 

 

 

하루키에게는 인터뷰이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부분을 돋보이게 만들어준달까,

혹은 평범하지 않은 대답에도 아, 그렇군요, 하고 어디에나 있는 일인 것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을 다룬 두 편의 르포에는 하루키의 그런 인터뷰어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언더그라운드>가 그랬다.

하루키와 사린가스 살포 사건의 피해자들,

즉 당시 지하철에서 사린 가스에 의해 본인이 부상을 입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을 인터뷰한 그 책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피해자들의 망가진 삶을 여지없이 공개하여 범인을 원망하거나 옴진리교에 분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건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그로 인해 무엇이 변화하였는지를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 책을 읽은 후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사건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단선적인 형태가 아니라 아니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파장으로 생각하게 된것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피해자들이 대부분 옴진리교에 비판적인 입장이기는 하나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옴진리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던 점이다.

아시다시피 세상이 이러니까요, 종교에 의지하다보면 그럴수도 있겠죠. 잘 이해는 안가지만. 하고 대답하는 그들에게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동시대의 고통과 병폐를 함께 겪고 있는 동지로서의 관용이나 배려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이 책, <언더그라운드 2: 약속된 장소에서> 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언더그라운드>와 마찬가지로

하루키가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의 관계자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기록이다.

다만 전작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 즉 사건 당시 옴진리교에 몸담고 있었던 이들을 인터뷰하였다는 점이다.

책의 앞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인터뷰 방식은 약간 다르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최대한 피해자들이 살아온 방식과 사건을 받아들이는 시각을 있는 그대로 끌어내기 위한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언더그라운드 2: 약속된 장소에서>의 하루키는 적극적인 인터뷰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뷰이의 의견에 대립되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고, 사회의 통념이나 윤리 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종교집단에 대한 배척이나 비난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하루키 답다,는 생각이 든다.

 

옴진리교, 라고 하면 사이비 종교나 과격한 테러단체를 연상하는 것이 모든 '일반인'들의 시각이리라.

그러나 인터뷰 안의 그들은 너무도 평범하고, 심지어 순진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살아온 배경도, 직업도, 나이도 모두 다른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저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랄까.

"이 세계는 잘못되어 있다"는 교주의 한 마디가 구원처럼 느껴졌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신은 현세에 맞지 않아, 라는 말에 역시, 하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의 현실에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나 이질감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삶에 대하여 고민하는

그런 교단의 분위기가 마치 청정수역과도 같아 겨우 숨을 쉴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의 시스템이란, 어떤 걸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차피 시스템이라는 것은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이 느끼는 어느 정도의 결핍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쨌건 그 시스템에 싱크로하는 비율이 높을 수록 개인이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

예를 들어 90% 정도의 비율로 시스템에 부합하는 사람은 지도자층에 오를 가능성이 크고,

70~80%의 사람들은 그 아래에, 50% 가량의 사람들은 또 그 아래의 계급에 오르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10%나 20%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10%도 안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하루가 영겁의 지옥같이 느껴진다면,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 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

 

내가 보기에 현재의 시스템은, 그런 10%의 사람들을 제거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싱크로 비율 대로 줄을 세우고, 각각에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며, 또 그 안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자꾸만 바운더리를 만들어 가는 세상.

옴진리교가 구원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시스템에서 배제되거나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이탈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 이 세상이 아닌 약속의 장소라면 분명히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

이 사회에는 그런 이들을 포용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는, 건전한 서브 시스템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나는 옴진리교의 신자들이 전쟁을 하는 멍청이들이나 자기 종교외의 모든 종교는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종교인들보다 더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론 범죄 행위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지만,

옴진리교를 믿고 입신한 것 자체로 우리가 그들의 성품이나 삶의 궤적을 평가절하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정상과 非정상의 경계는 흐르는 공기만큼이나 모호하다.

누구도 쉽게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다고 판단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행하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사건 너머의 사람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 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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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영혼이 없어도, 아름다운 날들이면 되잖아? <나를 보내지 마> by 가즈오 이시구로

서재

나를 보내지 마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민음사



담담한 슬픔, 서정적인 풍경-
작품을 평하는 몇 마디의 수사에 이끌려 읽기 시작한 이 작품.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다면 순수한 소년 소녀들의 평범한 성장 소설로 볼 수 있을 법한 내용이지만,
캐시와 루스, 토미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은 단순한 청춘 소설 이상의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배경은 1990년대 후반 영국.
주인공들은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기숙학교인 <헤일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좋은 선생님이 있고, 친구들과 선후배가 있고, 매일 수업을 듣고 각자의 활동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점에서는 다른 학교와 다를 바가 없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차단되어 있다는 면에서는 조금 특별한 학교이다. 주인공은 이 헤일셤에 있는 캐시와 루스,토미.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소녀였던 캐시의 시점을 따라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다보면 나의 청소년기에도 있었던 일들- 친한 친구와의 묘한 알력 관계와 멋진 남자애를 둘러싼 갈등,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애지중지하던 물건과 동경하던 선생님과 얽힌 에피소드 -과 그녀의 일상이 너무도 닮아 있어 나보다 어린, 작은 여동생을 보는 것 같은 평온한 기분이 든다. 다만, 딱 한 가지 사실만 빼고.

어쩌면 '생리'와도 비슷할 지 모른다, 는 생각을 했다. 
어떤 날,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 어른에게 이야기하면, 이런 말을 듣는거지. 그건 말야, 누구나 겪는 거란다.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야. 앞으로 계속 , 한달에 한번씩 이런 일을 겪게 될거야- 하고. 그럼 나는, 생각하는 거지. 아. 그렇구나. 한달에 한번이라니 귀찮은데-
그러니까 그 전에도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또래끼리는 쉬쉬하거나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 그런 사건.
딱히 항의 할 수도 저항 할 수도 없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 
헤일셤의 학생들에게는 <장기 기증>이란 그들의 미래가 그런 것이었을 지 모른다.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건지 듣기는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천 만족해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와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없이 미래가 정해져있지. 너희는 얼마 안있어 헤일셤을 떠나야 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
 

p 118- 119



다소 애매한 단어로 채워져 있지만, 그렇다. 헤일셤의 교사들이 '학생들' 이라고 부르는 캐시와 같은 존재들은 장기 기증을 목적으로 태어난 클론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헤일셤을 졸업하고 나면 간병사로 일하게 되고, 그러다 장기 기증을 하라는 통지서를 받는 순간부터는 장기 기증자가 된다. 그들은 네 번까지 장기 기증을 견디면 굉장히 잘 된 케이스라고 말하지만, 사실 장기를 떼어내는 수술 중이나 후에 사망한 다음에도 그들의 장기는 사체로부터 누군가에게 이식될 운명이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정해진 미래를 본 순간, 나는 어찌해야할 지 잘 알수 없는 그런 종류의-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차올라 투명하게 일렁이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이 '슬픔'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나는 단순히 정의하기는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분명, 슬프고 안타깝다.
많은 독자들은 이렇게 썼다. '마음껏 꿈꿀 수 없어서' '어린 나이에 죽어야 하니까' '미래가 정해져 있어서' 캐시와 루스, 토미가 가엾다고.
하지만 몇 가지 생물적, 사회적 요소를 배제하고 나면 그들의 미래는 우리들의 미래와,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
 

꿈꾸는 대로 마음껏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은 빚에 허덕이고 있고.
학벌 때문에, 집안 때문에, 경제력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은 산처럼 쌓여있고.
좋은 고등학교 가서,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선 나와 비슷한, 혹은 어린 친구들이 생에 작별을 고하고 있을테고.  

그런 의미에서, 학창시절이나마 훌륭한 선생님과 친구들 곁에서 나름대로 '행복했던' 헤일셤의 학생들이, 교사가 말하는 보통 '인간'보다 훨씬 더, 불운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시한부를 선고받은 환자와 장기기증을 위해 태어난 클론, 각각에 대한 내 슬픔의 종류와 깊이가 다른 건 왜일까? 

그건 아마  헤일셤의 누구도 '저항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에 있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너무도 불합리한 일.
타인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몸에 있는 장기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행사하는 이 현실에 대해 캐시와 토미는 물론 단호한 성격의 루스까지,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냥,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자신들 뿐 아니라 같이 있는 모든 학생들이 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니까. 
헤일셤 학생들이 집행 연기라는 일종의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소문 때문에 코티지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말 그래도 '연기'일 뿐이니까 말이다. 만약 그들 중에 하나라도 집행을 면제 받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읽는 동안 '클론','장기기증자' 라는 면에서 만화 <월광천녀>도 잠시 떠올렸는데, 살기 위해 싸우는 카부치 섬의 도너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아닌가. 자신들도 인간이고,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클론이라는 이유로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는 없다며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클론'이니까, '클론'의 삶을 수용하는 <나를 보내지 마>의 클론들을 보면서, 어쩌면 나 또한 그들의 삶과 완전히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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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기나긴 밤이 빛의 바다로 침몰하는 순간, <7년의 밤> by 정유정

서재
7년의 밤 - 10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


"내 아버지는 살인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는, 그의 아버지가 일가족 4명이 즉사한 교통 사고의 가해자였다고 담담히 털어놓았다.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했고, 그래서 술에 젖어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직 어렸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죄책감'이라는게 무엇인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해했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는 살인자이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쉬이 슬퍼할 수 없다는 것만은 알았다고.
 

'서원'과 함께 지새던-그 오랜<7년의 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나는 기억 어딘가에 묻어둔 그 소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는 휴대전화를 접어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은 '지난 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 이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 '그의 아들' 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열 두살이었다.                                                                        
 -p8


모든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들 외의 사람들에게 신경이 쓰였다.
섣불리 슬퍼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가해자의 유족들. 혹은, 불의의 사고로- 정말 '운명이 느닷없이 변화구를 던진 날'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하여. 누구나 그들에 대해 떠들어대지만 정작 아무도 알지는 못한다.
불합리 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 아닌 다음에야 어차피 '남의 일'일 텐데, 그저 타인일 뿐인 사람들이 추측하고, 이야기하고, 단정짓고 비난하거나 동정한다는 것이. 자신이 겪고있는 상처와 고통이 단지 '타인의 일'일 뿐인 다른 누군가의 유흥거리나 재밋거리가 되어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을만한 너덜한 누더기가 될 때까지 치여야한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힘겨운 나날이 계속 되고 있는데, 이야기 한번 나눠보지 않고 멋대로 자신의 아픔을 재단하고, 그에 따라 내키는대로 동정하거나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이 어떨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최현수와 최서원이 바로 그랬다. 영원히 지속될것만 같은 지옥 속에서 보낸, 기나긴 밤. 


그 아이는 어디서든, 무시로 튀어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모습이, "아빠"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왼손 밑에서 버둥거리던 몸부림의 감촉이, 누가 그 일을 저질렀는지 일깨우는 일은 매일 매순간 일어나고 있었다. 각성의 순간에는 미칠것 같고, 미칠것 같은 순간이 지나면 망연자실의 순간이 찾아 들었다. 그 순간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신에 대한. 미래에 대한,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데 대한, 부서진 삶을 다시는 복원할 수 없다는 데 대한 공포.
(..)

옳지 않았다. 공평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쥐 한마리 죽여본 적이 없었다.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간 적도 없고, 독 묻은 혀로  남의 등골을 빨아 먹은 적도 없었다. 거창한 소망을 바란 적도 없었다. 가족에게 세 끼 밥을 먹이고, 아들을 키우고, 내키면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딱 지금만큼의 행운을 바랐다. 그것이 그리도 주제넘은 바람이었더냐.
두려움 밑에서 깜박대던 분노가 불길로 타올라 소녀에게 옮겨붙었다. 대체 너는 누구더냐. 죽고 싶었다면 호수로 뛰어들었어야한다. 죽을 힘을 다해 버둥거린 끝에 유리공 하나를 손에 쥔 남자의 차가 아니고.                    -p121 



작가는 이 작품이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할 상황'이 생긴다. '그러나'는 온전히 한 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나'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으며, 따라서 불편하고 혼란스러워도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라고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그리고'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변화구가 던져진 다음, 체인지 후 다음 회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마운드 위에 선 신인 투수 최서원과, 명포수 최현수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평생 2군일줄만 알았던 남자가,그저 운명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는 것 처럼 보였던 한 남자가 마침내 승리한, 그런 이야기라고.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결과값이지만, 그건 아마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수식에 의하면 매우 당연한 '그리고'일거라고.
그런 '그리고'가 인간에게 드리운, 길고 짙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라고.
빛도 어둠도 없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만 계속 이어지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런 밤이 필요했을 지도 모르겠다.
너무- 크고-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는다.
빠져나오겠다는 생각마저 접게 만드는, 그 아득한 어둠과 고요를 상상한다. 

세령호의 짙은 물안개 속에 둘러싸인 한 마을을 생각한다. 
아직 작은 소년과 그의 아버지. 가늘고 새하얗던 소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얽히기 시작한 그들의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면을 엿본다.
탄식한다. 


'그리고' 어둠의 끝, 저 멀리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빛을 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한 걸음, 앞을 향해 발을 디뎠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다시 한 발짝.
나아갈수록 소리는 멀어졌다. 어둠은 차차 옅어졌다. 
마침내 환해졌다. 그 아이의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허공을 디디며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 아이의 흰 종아리를 보았다. 그 아이가 남긴 희미한 발자국 위로 잿빛 오후가 밀려왔다. 세상의 초침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아저씨의 봉고가 내 곁에 와서 섰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고 길었던 밤이 빛의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p517



      7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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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것,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by 다우어 드라이스마

서재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 8점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김승욱 옮김/에코리브르


저번 학기의 개인적 주제가 '기억' 이었기 때문에 일단 사두었다가 역설적으로 학기가 끝난 후에야 읽게된 책. 
대부분 자전적 기억에 대한 내용이라 내가 의도했던 바와는 약간 달랐지만, 대신 평소에 궁금하던 일상의 궁금증에 대해서도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었던 점은 장점으로 꼽을만 하다.
읽던 중에 인상 깊은 챕터를 몇가지 소개해 본다.


CH 3. 냄새와 기억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따온 '프루스트 효과' 라는 것은, 그 작품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냄새가 어린시절의 기억을 불러오는 현상을 말한다. 흔히 후각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아있는 감각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진화의 관점에서 후각은 원시적인 감각이다. 후각은 후구 Olfactory bulb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신피질처럼 대뇌에서 나중에 발달한 부분들에 의해 덮여진다. (..) 여러 감각 중에서 후각은 감각정보가 분석되는 뇌와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다. (..) 후구는 뇌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변연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계통 발생학적으로 볼 때 변연계는 우리 뇌에서 가장 원시적인 부분이며, 경계심과 감정을 담당하는 구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후각은 또한 기억 저장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해마와도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 대접을 받는 대가로 후각은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과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후각은 '침묵의 감각'으로 알려져 있다.
냄새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만들어내는 물건을 언급하며 냄새를 설명하거나, 기분좋은 냄새, 끔찍한 냄새 등 그 냄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토대로 냄새를 설명하기도 한다.

CH.9 그랜드 마스터와의 대화
전 세계 챔피언인 세이브란드스는 승률 92.5% 라는 기록으로 자신의 기록을 갱신했다. 그는 1982년 헤이그에서 체커판을 보지않은 채 여러명의 상대와 동시에 체커를 두는 공식 시합에서 처음으로 출전하여 승률 80%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나중에 실시된 연구들에서도 체스판을 보지 않고 게임을 하는 능력은 '시각적'인 재주라기보다 '공간적'인 재주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체커와 체스 선수들 중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데도 마스터급에 도달한 사람들이나, 그랜드 마스터가 된 후 시력을 잃었는데도 실력이 조금도 줄지않은 사람들이 있다. 심리학자인 Jongman은 체스판을 보지않는 게임에서 선수의 눈 앞에 떠오르는 '그림'은 일종의 잔상이 아니라 재시각화된 장면임을 증명했다. 그랜드마스터는 뛰어난 실력덕분에 모든 연상과 암호를 동원해 머릿속을 말의 위치를 재구성할 수 있다. 체스판을 보지 않는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수의 패턴이다.(..)세이브란드스 역시 말의 위치를 보면 예전 게임, 고전적인 첫수, 마지막 수의 분석, 전술적인 작전, 이미 성능이 입증된 함정 등에 관한 기억을 한꺼번에 떠올린다.

CH 12. "우리가 몰고 다니는 달걀형 거울 속에서": 데자뷰 현상의 이해
헤이만스는 정확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 '긍정적인'응답자(데자뷰나 탈 개인화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더 자주 타나나는 세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그 세가지 특징은 감수성이 예민하다, 기분변화가 뚜렷하다, 작업리듬이 불규칙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들은 단어 소회현상도 더 자주 경험했다. 데자뷰 현상과 탈 개인화는 밤이나 저녁에 주로 다른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응답자 본인이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때, 지루하고 골치 아픈 공부를 하거나 술을 마신 뒤라서 피로를 느끼고 있을 때 가장 많이 발생했다. 헤이만스는 간단히 말해서 집중력이 떨어지고 정신적 에너지가 감소했을 때 그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고 정리했다. 헤이만스는 데자뷰 현상을 경험한 응답자들은 탈 개인화, 단어 소외 또한 경험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게다가 이 세가지 현상이 또 같은 환경에 의해 촉진된다는 사실은 이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했다. (..) 이 가설에 따르면, 단어 소외는 어떤 단어와 의미론 적 기억이 연상을 통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탈 개인화는 연사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서 단어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친숙한 느낌을 잃어버리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데자뷰 현상은 연상작용이 미약할 떄 발생한다. 이떄 우리 의식은 현재의 경험을 오랜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의 기억으로 잘못 인식하게 된다.

CH 13. 회상
McCormack은 골턴의 방법을 이요해 노일들의 자전적 기억을 연구했다. 그는 평균 연령이 여든 살인 피실험자들에게 '말''강''왕' 등의 단어를 제시하고, 그 단어들로 인해 떠오르는 기억의 날짜를 기록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기억이 삶의 첫번째 4분기에 속했으며, 그보다 약간 적은 수의 기억이 두 번째 4분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번 째 4분기에는 떠오르는 기억의 숫자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수십건의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발견되었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은 다음 세가지이다. 첫째, 신경생리학적인 면에서 기억력이 20대 때 절정에 이른다고 생각해볼 수 있따. 둘째, 열 다섯살에서 스무살 사이에 사람들이 대개 기억할 만한 일-대부분 온갖종류의 첫 경험-을 많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어린 시절과 성인기 초기에 사람들이 성격 형성과 정체감 확립에 영향을 미치고 인생 행로의 지침이 되어주는 일들을 겪는 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살아오면서도 여러번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반복적인 회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CH 14. 나이들 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윌리엄 제임스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어렸을 때 사람들은 항상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불안감은 생생하고, 기억은 강렬하다. 그때에 대한 우리의 기억 속에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아주 재미있는 여해을 했을 떄의 기억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여러가지 일들이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가 갈 수록 이런 경험들 중 일부가 자동적인 일상으로 변해 사람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하루 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알맹이 없이 기억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래서 한 해의 기억이 점점 공허해져서 붕괴해 버린다.> 귀요는 심리학적 시간의 내적인 광학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인들을 정리했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우리의 느낌과 생각의 강도, 이 두가지가 교체되는 속도, 느낌과 생각의 횟수, 우리가 거기에 쏟는 관심, 기억 속에 그것들을 저장하는 데 드는 노력, 그것들이 불러내는 감정과 연상 등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시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인들이 거꾸로 시간을 잘못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는 망원경같은 효과를 낸다. 망원경을 이용하면 사물을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사실 기억을 실험적 데이터로 증명하는 방법론적인 부분을 기대했으나, 최신 연구 결과는 일부 언급되는 데 그치는 것이 좀 아쉽다.
그러나 기억에 대한 개론서로는 충분히 흥미있는 내용이라 제법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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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by 무라카미 하루키

서재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6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문학사상사




길고 서정적인 제목은 혹시나 이 사람이 변했나,했지만
역시나 시크한 아저씨 답게 마음 한 구석 기기묘묘한 간지럼을 선사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아쉽게도 신작 단편집은 아니다.
신작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깨달은 건데, 문고판 보다 더 얄팍한 듯한 책 안에는 <빵가게 재습격>이나 <양을 쫓는 모험><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TV피플> 등 오래전에 보았던 단편집에서 읽었던 듯한 소설이 몇 실려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지금은 많이 변한듯한, 하루키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나의 100퍼센트의 사람과 마주치는 일을 상상해 본다.
나는 공교롭게도 질끈 묶은 머리에 슬리퍼, 3년 째 입고 있는 헐렁한 면바지에 낡은 티셔츠를 입고 있다. 평소라면 아는 사람이라도 모른척하고 지나가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아무리 봐도 그 사람은 나의 100퍼센트라고 마음 어딘가에서 삐용삐용, 경보가 울리고 있다. 100퍼센트의 사람과 함께라면 외롭지 않겠지. 더 이상 운명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고, 그저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도 삶의 모든 것이 충만해진 기분일 거다. 그래, 그 100퍼센트의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나의 100퍼센트를-

하지만 어떨까. 나는 그의 100퍼센트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의 80퍼센트이고, 그러니까 우리는 90퍼센트의 연애를 하게 되고, 아주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계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사랑일지 모르지만, 그렇게되면 나의 '100퍼센트'에 의미가 있을까. 사실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았던 것이 아닐까. 그냥 어딘가에서 75퍼센트나 80퍼센트의 사람을 만나, 80퍼센트의 만남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한 삶일 수도 있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냥 나의 100퍼센트의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거다. 집에서 막 나온 엉성한 차림의 여자인 채로.



-택시를 탄 흡혈귀-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꽤 좋아하는 단편이다.
우연히 타게 된 택시의 운전기사가 흡혈귀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의 '나'의 반응은 일반적인 상식론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특이하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뛰어내려 도망가거나 할 법도 한데, '아, 그러십니까'하는 반응.
'그럼 어떤 피를 좋아하시나요?' 하고 마치 스테이크 굽기의 선호도를 묻는 듯한 뉘앙스로 가볍게 응수하고 만다.
언론에라도 알려지면 큰 소동이 날텐데 여유있게 자신이 흡혈귀라고 밝히는 운전기사도 그렇다. 이 조심성 없는 사람들 같으니.
아무튼 그래서, 이 소설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든다.
非일상을 일상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대범함 같은 것이,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잘 자요""잘 자" 하고 끝나는 태연자약한 마무리가.  



-그녀의 거리와 그녀의 면양-

불현듯, 생生의 길목에서 '나'와 호텔 TV 속, 마을을 홍보하는 동영상 속의 '그녀'는 마주치게 된다. 아니, 마주친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려나. 의도를 갖고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나'뿐이니까. 200마리의 소와 100마리의 말과 100마리의 면양이 사는 마을의 그녀는 카메라를 보고 또박또박하게 이야기하고 있고, 나는 그 카메라 너머 호텔 방에서 스무살 전후의 그 아가씨를 바라보며, 자그맣지만 정겨운 어딘가의 마을-혹은 '나'의 고향을 떠올린다. 그런 식으로, 나도 가끔 '나'와 '당신'이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게 이상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게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주는 집 앞 까페의 아가씨라던가, 우연히 도서관 옆 자리에 앉은 멋진 남학생이라던가, 아니면 곧 결혼할 같은 과의 여학생이라던가. 안녕, 하는 인사를 주고 받는 사이에서도 어느 순간, 상대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들때가 있는데- 그런 기회 조차 주어지지 못하는, 정말이지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인 인연에게도 나는 어떤 안타까움을 느낀다.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는 않는다. '그'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키는 참, '여성'이나 '연애'에 대해서 많이 쓰는데,
절대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와 '그녀'의 시선이나 대화, 가벼운 스킨쉽 정도의 묘사가 있을 뿐이다.
같은 장소에 있는 남과 여, 그리고 맞닿은 시선. 가벼운 일상 이야기일 뿐이지만 어딘가 겉도는 대화.
그들은 사랑하는 걸까? '사랑하면서 왜 그렇게 보내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 될 때도 있지만, 한번도 하루키 소설 속의 그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말한 적은 없다.신기하게도.
그런데도, 그럼에도 아마 그들은 사랑일 것이다.
심장의 터질듯한 두근거림이나 두 뺨의 홍조, 이따금 눈물어린 고백이 없다해도
아마도 그것 또한 사랑이리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해 선뜻 자신의 옆 자리를 내주는 기꺼움, 좋아하는 와인 한 잔과 재즈를 함께 즐기지 않겠냐고, 망설이듯 건네는 한 마디.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그런' 사랑 또한 사랑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소나기를 맞은 듯 촉촉해진다. 
그런 느낌이 좋다. 

그래서 하루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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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이해할 수 없는 인간 행동의 비밀, <행동 경제학> by 도모노 노리오

서재
행동 경제학 - 10점
도모노 노리오 지음, 이명희 옮김/지형



이번 기말 페이퍼 주제를 뭘로 할까, 하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도모노 노리오의 이 책 <행동 경제학>을 읽고 의사결정과 관련된 내용으로 결정했다.
Kahneman과 Tversky의 <Prospect theory>는 누구도 의문을 갖지 못하던 주류 경제학의 한계를 명백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기념비적인 논문이지만, 사실 이미 몇 십년 가까지 흐르다 보니 그에 대한 비판과 관련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책, <행동 경제학>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유용한 책이다.
전망이론과 휴리스틱에 관한 다소 고전적인 내용에서부터, 의사결정과 관련된 분야의 대중적인 연구 성과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만약 인간 행동이나 소비자 분석, 혹은 의사결정이라는 딱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다. 게임이론, 죄수의 딜레마, 최종 제안 게임 등 경제학에 약간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어 봄직한 주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지면을 할애한 것이 이 책의 미덕인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야말로 행동 경제학에 대한 입문서이니만큼 최신 연구 성과에 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치 함수 (Value Fuction) 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인간의 행동이 항상 수학적인/ 또는 경제적인 기대값의 가치에 의해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가치 함수 그래프에서는 이익 영역에서는 시간이 지날 수록 경사가 완만해지는 위험 회피 경향을, 손실 영역에서는 준거점 (Reference point: 준거점의 위치는 의사결정자의 주관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항상 원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험 추구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가치 함수의 내용 중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준거점의 설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실제 생활에서의 의사결정 상황이 실험에서처럼 이익과 손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만큼, 의사결정자의 주관에 따라 이익 및 손실을 판별하는 준거점의 위치가 중요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준거점의 이동과 위치 설정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적이나 외부적 요인, 혹은 내부적이나 성향적 요인  중 어떤 변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될 것인가? 그리고 이 경우, 어떤 프레이밍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인가? 사실 이런 상황적 맥락을 고려한 의사 결정 상황에서도 가치 함수가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Predictive Model 로써 유용한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으며, 따라서 최근에는 특정 상황-개인적/상황적 변인 등이 통제된-에서의 실험을 통해 Prospect theory를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 것은 그야말로 나의 욕심인 듯 하고 ^^
일반인들이 행동경제학에 대한 지식 수집 차원에서 가볍게 읽을만한  책으로는 딱 적절한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눈여겨 봐두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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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그 대통령의 비밀스러운 사생활,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

서재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 - 8점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지음, 양병찬 옮김/조윤커뮤니케이션

FACTS

1. 1607년부터 1865년까지 250여년 동안 미국의 암흑가에서는 뱀파이어가 창궐했지만,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2. 에이브러햄 링컨은 당대의 뛰어난 뱀파이어 헌터 중 하나였으며, 일생동안 뱀파이어와 치른 전쟁 이야기를 몇 권의 비밀 일기로 남겼다.

3. 오래전부터 링컨의 비밀 일기가 존재한다는 그럴 듯한 풍문이 전해져 내려와 역사가들과 전기 작가들의 귀를 솔긴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뜬 소문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사실들을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내 한몸의 안일을 위해 입을 다물수도 없다.
만약 내가 천기를 누설한다면, 모든 미국인들은 광기에 휩싸이거나 자기네 대통령을 정신병자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종이와 잉크로 살아 남아야 한다.
그리고 이 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한 줌의 티끌로 사라질 때까지 감춰져 있어야 한다."


                                                                                 -에이브러햄 링컨, 1863년 12월 3일자 일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61년 3월부터 1865년 4월까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던 남자.
미국에서 노예제가 확장되는 것을 거세게 반대했으며,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 했고, 수정 헌법 13조의 통과를 주장하여
결국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어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비록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우체국장, 변호사, 토지 측량 등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던 정규 법학 교육을 받지 않은 변호사 출신이었지만 오늘날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리고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에이브러햄 링컨의 숨겨진 이야기 이다.

바로 그 에이브러햄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였다니 !
작가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가 의문의 남자, 헨리에게서 링컨의 비밀 일기장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발칙하게도,
그 위대한 대통령의 숨겨진 직업은 바로 '뱀파이어 헌터' 였다고 폭로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뱀파이어에게 깊은 증오심을 갖게 된 링컨은 사냥 중 묘한 뱀파이어, 헨리의 도움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다. 헨리는 원래 인간이었지만 뱀파이어에게 물려 불로불사의 생을 얻게된 뱀파이어로 링컨을 훌륭한 뱀파이어 헌터로 훈련시키는데 전력을 쏟는다. 그리고 링컨이 모든 걸 배우고 떠난 후부터 그의 주소로 의뢰장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발신인은 H. 그는 모든 뱀파이어가 증오해야 할 대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뱀파이어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링컨에게 사냥해야할 뱀파이어의 이름과 주소, 직업을 편지에 적어보내는 형태로 그에게 심판을 의뢰한다. 그리고 젊은 에이브러햄 링컨은 항상, 서신을 받는 즉시 뱀파이어를 해치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나갔다. 그렇다.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뛰어난 뱀파이어 헌터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역사 상의 진실과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링컨의 어머니, 낸시의 죽음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실은 뱀파이어에게 물린 후유증으로 죽었다? 링컨이 노예제도를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사실, 뱀파이어들이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흑인 노예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와서 링컨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이상, 확신하지 못하는 Fact에 대한 이유에는 모두 뱀파이어가 관련되어 있었다고, 작가는 서문에서부터 끝까지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덕분에 엑스맨 같은 초인 히어로물의 액션활극을 보는 것 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줄거리를 따라가다가도, 문득 '이게 정말 사실일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삽화(혹은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은 링컨이 뱀파이어라는 증거를 눈 앞으로 들이미는 듯 하여 진실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가게 된다. '그' 대통령 각하는 정말, 일이 없을 때면 긴 전투복 안에 도끼와 석궁을 숨기고 바람같이 날아갔던 것인가. 만약 작가의 의도가 독자의 마음 속에 이러한 의구심의 씨앗을 틔우는 것이었다면, 그것이 이 소설을 더욱 재밌게 즐기기 위해 마련해둔 장치였다면 그는 이미 70%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아무래도 링컨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중간 중간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있고, 가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기는 (?) 장면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대통령 링컨에 대한 당치 않은 의혹이 슬며시 고개를 들게 하기엔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굳이 링컨 대통령이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도, 여름날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액션 소설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 듯. 영화화를 기대해 본다.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 공식 홈페이지>
http://www.al-v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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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일상과 여행 사이의 기록, <가만히 거닐다> by 전소연

서재
가만히 거닐다 - 8점
전소연 지음/북노마드


하루에 한번은 길을 가다가 눈에 띄는 까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책을 읽는다. 어떤 날은 까페안에 흐르는 음악이 배경음악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이 곳 사람들의 언어가 배경음악이 되기도 한다. 낯선 언어가 배경음악이 되는 시간에 책을 읽는 일은 '그 곳을 떠나 이곳에 와 있구나'를 실감하게 해준다. 어떤 음악보다 더 색다르며 어떤 음악보다 더 솔깃하다. 그러다 읽고 있는 책에 빠져들면 내 나라의 말과 낯선 땅의 말이 오버랩되며 알수 없는 기분에 사로 잡히게 된다.
또로록 눈물이 흐를 만큼.

                                                                                                                                                            -p127-


나에게 여행,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닥 반갑지 않은 것들 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이드의 설명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차량 이동, 끝없이 걷는 길, 길, 길, 그리고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
급기야 '내가 왜 편한 집 놔두고 남의 땅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드는 시점에 이르면
전부 다 벗어던지고 집에 돌아와 안락한 내 방 이불 속에서 기분 좋게 잠들었다가 일어나 아침을 먹고,
책 한권을 들고 어슬렁 어슬렁 근처 까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새로 발견한 디저트 가게에서 달콤한 케익 한 조각을 사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My sweet home 에 돌아오고 싶은..
그런 여행지에서는 할 수 없을 일상을 꿈꾸곤 했다. 
미국,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모두가 꿈꾸는 '여행'이라는 일탈행위가 나에겐 그렇게 한없이 고단한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내가 방문했던 몇몇 나라들과 도시들에 대한 인상은 흐릿한데,
몸에 쌓여가던 피로와 여기저기서 터지던 사진 플래쉬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내가 여행을 기피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여행기, <가만히 거닐다> 는 다르다.
이름있는 건물이나 간판 앞에서 자기 얼굴만 빠꼼히 내민 그런 증명 사진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도 있을 법한 다정하고 친근한 풍경.
김이 옅게 피어오르는 커피잔이라던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책가방을 멘 여학생의 뒷모습,
길가에 핀 들꽃과 그 옆에 세워진 낡은 자전거 같은 따스한 느낌의 사물과 사람들이 단정한 책표지 안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누군가와 마음을 다해 만날 때면 '사귄다' 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산다'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너를 산다" 그 말이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표현보다 진하게 들리는 '너를 산다' 는 것은 어쩌면 여기가 아닌 그 곳을 사는 여행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도시에 가서 사는 것. 긴 호흡으로 사는 여행이 불가능하다면 짧은 여행이라도 일상적인 여행으로 여행의 방식을 바꾸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동안 그곳에 살았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p26-


스스로 '빈둥거리기 위한' 여행이라고 불렀던 만큼, 이 여행기라고 부르기도 뭣한 잔잔한 기록 속에는 아침 산책과 같은 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안단테 Andante 의 여유와 함께, 모닝커피를 마시며 '걸음 걸이의 빠르기'로 천천히 기분좋은 산책을 했다" 는 이 여자의 새로운 일상이 어찌나 부럽던지 ! 아아, 어쩌면 이것이 내가 꿈꾸던 "여행" 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맛보는 일상의 연속. 이제껏 보지못한 것들, 유일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무심코 들어간 가게에서 맛본 맛있는 우동이라던가 따끈따끈한 빵의 온기처럼 익숙한 것들을 만나는 것. '일상의 재발견'과 같은 낯설게 하기가 사실은 진정으로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문득 낯선 거리가 걷고 싶어졌다. 
놀랄만큼 맛있는 슈크림을 먹으며, 지금은 먼 곳에 있을 당신을 떠올리며, 또는 그 옛날 언젠가 가슴 속에만 묻어둔 추억을 되새기며, 
새로운 땅의 신선한 공기가 고요하던 내 마음의 수면 위에 바람을 불어넣어 깊은 곳까지 환류(還流)할 수 있도록.
정겨운 내 집에 곧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가슴에 품고, 
어색한 듯 익숙한 나라에서 안단테 안단테한 속도로 느긋한 산책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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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동양과 서양,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화의 차이-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서재
동과 서 - 8점
EBS 동과서 제작팀.김명진 지음/예담



이 땅에 태어나 인간으로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수도 없지만 나의 행동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Rule,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동과 서> 문화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도 문화 간 차이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궁금해 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교양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실험과 그에 대한 대답, 그리고 해석과 함께 전문가들의 의견이 수록되어 있는 식입니다.



scene 1. 사람들에게 원숭이, 바나나, 팬더 그림을 보여주고 두 가지로 그룹핑하게 할 경우
             동양인: 원숭이, 바나나/ 팬더 -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기 때문
             서양인: 원숭이, 팬더/바나나 - 원숭이와 팬더는 같은 포유류 이기 때문
             
              → 서양에서는 만물을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보고,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들끼리 묶음으로써 정리하려고 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개체 각각의 특성보다는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scene 2. 뭉크의 '절규' 그림을 보여주고 이 사람이 절규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을 때
            동양인: 주변 분위기가 음산하다. 배경에 있는 남자 두 명이 주인공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다.
             서양인: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 서양에서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그런 고정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믿는다.
                 한편 동양에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그 사람의 본질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scene 3. 자기 자신이 언제 가장 행복한지를 물었을 때
             동양인: 대학에 합격했을 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여 회사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서양인: 개인적으로 목표한 일을 성취했을 때

             → 서양인은 개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동양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주위 사람들을 위해 한 일에 대해 성취감을 가장 크게 느낀다.





그 외에도 인상 깊었던 것은 동서양의 이모티콘에 대해서였는데요,
한국과 일본에서는 기쁨과 슬픔의 이모티콘이 ^-^ , ^ ^ 나 ㅠㅠ, ㅜㅜ 인데 비하여 미국에서는 기쁨으로 :-D, 슬픔으로 :-( 등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보면 동양 문화권에서는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미국에서는 비교적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입꼬리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본래 TV 프로그램인 것을 책으로 펴낸 만큼,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나 표가 많은 건 좋지만 아무래도 책의 깊이가 부족한 느낌은 들지만
문화나 인간 행동 쪽에 관심이 있으시거나, 혹은 유학 등을 눈 앞에 두신 분들이라면 한번 읽어보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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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by 더글러스 애덤스

서재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더글러스 애덤스저 | 공보경역 | 2010.02.01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끝없이 쏟아지는 블랙 유머와 통통 튀는 재치를 사랑하셨던 분이라면,
바로 이 책,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을 체크해 두셔도 좋을 듯 합니다.
비록 포드 프리펙트나 자포드 비블브락스같이 매력적인 인물들이 재출연하는 시리즈 물은 아니지만
정신 산만하고 시끄럽고 세간의 상식을 은하수 저 너머로 날려버린것처럼 어이없기로는 <은하수를 ~> 에 버금가는
전체론적 탐정, 더크 젠틀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자신은 다소 게으르고 무능력한 것 외에는 별로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비상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은 가만히 있어도 사건을 불러오는 악몽의 원인이라 이거죠, 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사전지식은 절대로 ! 필요하지 않지만 (북유럽 신의 계보에 대해서 알아두면 좋을지도 모르지만,그건 작품 이해보다는 개인의 지식 습득에 더 의미를 두는 편이 좋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왜?" 라던가 "어째서?" 라던가 "말도 안돼!" 라는 대사를 외치지 않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면에서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경우 이 책을 가득 채운 기상천외한 인물들 때문에 첫 장부터 머리를 싸쥐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우선은 정말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북유럽의 신, 토르를 찾아나선 케이트 셰터가 있습니다.
피자배달이 안되는 영국생활에 대해 심한 불만을 갖고 있는데다 가끔은 그 불만을 이용하여 피자가게 점원과 거친 통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하는 케이트는 딱 그 점만 빼면 평범한 일반 시민입니다. 단, 어디까지나 공항에서 몸집 큰 금발의 외국인(=토르)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그럼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용맹한 북유럽의 신,  철퇴 '묠니르'를 휘둘러 그의 적을 모두 쓰러뜨린다는 신 토르는 어떤가 하면
속죄를 위한 고행으로 웨일스에 있는 돌들을 모두 세다가 중간에 어디까지 세었는지를 까먹고 마는 비운의 인물입니다 ;
그래도 그의 아버지 오딘이 자신이 가진 불사의 영혼을 인간 변호사와 광고업자에게 팔아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려는 -
문제의식을 가진 유일한 신이기도 합니다.

그럼 모든 만물의 아버지이자 최고신인 오딘은 왜, 자신의 영혼을 팔아야만 했을까요?
그가 영혼을 팔아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오딘의 힘을 얻게 된 의뢰인의 요청으로 사건에 뛰어들었으나, 바로 그 의뢰인이 자택에서 살해당함으로써  비논리와 몰상식의 롤러코스터에 진입하는 이 이야기는, 결국 위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 답을 알고나면, 글쎄요, 피식 터지는 실소와 함께 이제는 더이상 전능하지 않은 존재, 잊혀진, 버려진 존재에 대한 연민이 피어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너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널 찾아온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 보려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느냐?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아느냐? 우린 숨어서 살고 있지 않다. 바로 여기 살고 있다. 너희들 틈에 끼어서 돌아다닌다. 나의 백성들, 즉 너희의 신들 모두. 너희는 우리는 탄생시켰다. 그래놓고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이 세상, 너희들이 우릴 배제하고 만들어놓은 이 세상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나를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 투구를 쓰고 있을 때 말인가요?"
"내가 이 투구를 쓰고 있을 때 더더욱 안 쳐다본단 말이다!"


더크 젠틀리 시리즈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탐정씨는 사건 해결에서의 활약보다는 내내 코가 부러진 상태로 다니는 것이 더욱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저는 그 안하무인의 성격에 민폐덩어리같은 행동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어요 ;  하지만 그런 더크 젠틀리의 입을 빌려 나오는 주옥같은(!) 대사들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보여주었던 잔뜩 꼬인 풍자와 개그를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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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휴일에 읽을만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무덤으로 향하다」 by 로렌스 블록

서재
무덤으로 향하다 - 8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추리소설에 관한 한 나와 아버지의 취향이 일치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로렌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 만큼은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재밌다 !!!!


로렌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 는 재밌다.
물론 추리소설이 재미가 없으면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는 재미는 남다르다.
우선 발단부터가 그렇다.

더보기



시작만 보면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평범한 납치 살인 사건인가 싶기도 하지만,전작인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 한껏 비꼬인 세계관을 보여준 로렌스 블록은 절대 (!!) 피해자의 남편을 그저 선량한 시민으로 놔두지 않는다. 이 멋진 작가는 피해자 프랜신 코리의 남편, 캐넌 코리에게는 '마약상'이라는 비합법적인 직업을, 그의 형인 피터 코리에게는 알콜중독이라는 습관를 선물했다. 자아, 여기서부터 이 소설이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솔솔 오지 않는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을 탐문하고 주변 인물들을 수사하면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나가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사실 매튜 스커더의 수사 방식은 매우 전통적이다. 그 자신도 말했듯이 그는 면밀한 직관이나 전문적인 식견 따위는 없는 그저 알콜중독 탐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오랜 경찰생활과 몇 안되는 탐정일에서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면 결코 놓지 않는 물귀신 기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저 물고 늘어진 다음에 다른 단서를 찾으면 다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수사법이자 믿음직한 해결책이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나 파일로 밴스처럼 현장을 보기만 해도 범인 얼굴이 팟 하고 그려질 정도로 명석한 전문 탐정은 아니지만- 지옥 끝까지라도 범인을 쫓아가겠다는 각오와 끈질긴 인내심과 행동력으로 결국 목적을 달성하곤 하는 가난한 알콜중독 탐정이 우리의 주인공, 매튜 스커더인 것이다. 
그런 그가 연쇄 살인범을 찾아내는 과정은 소설 속에서 확인하는게 훨씬 더 재미있으니 일단 패스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진정한 미덕은 주인공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전작에서 끊었다 마시기를 반복하던 매튜는 이번 권에서는 제법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려 단 한번도 안마셨던 것 같다)
그리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있던 일레인과의 관계도 성숙한 자세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믿기 어려워하고 늘 마음 주는 걸 두려워하던 그가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게 바로 정신적 성장의 결과 아닌가. 술을 입에 댈 때는 혼내고 싶고 일레인 앞에서 말할까 말까 전전긍긍할 때는 그저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싶을 정도로 친근한- 예를 들면 구제불능인 삼촌이나 친한 옆집 아저씨 같은- 그의 발전해나가는 모습에서 인간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니리라. 

세상에는 많은 추리소설이 있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도 그 가짓수만큼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수많은 탐정들 중에서도 단 한명만 꼽으라면, 나는 아마 매튜 스커더를 선택할 것 이다.
탐정으로서도 그렇고, 힘들 때 곁에 두고 싶은 사람으로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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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철학 이야기, <철학까페에서 문학 읽기> by 김용규

서재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8점
김용규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아마 이런 책을 '양서'라고 하는 거겠지요.
몇 번이나 읽은 후에도 소설을 읽은 것만큼 이렇다 할만한 감흥이 오는 건 아니지만,
 이 책 <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는 지금까지 드문드문 스쳐지나갔던 문학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수는 있을 겁니다.
바로, '대체 이 작품이 왜 유명해?' 라는, 
부끄러워서 차마 남들앞에서 던져본 적 없는 물음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저 기다리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왜 그렇게 걸작으로 꼽히는 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사실 원작을 제대로 본 적도 없긴 하지만 대본을 흘끗 본것만으로는 대체 무슨 얘긴지 의아했거든요.
그런데 <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의 저자는 매우 친절히 작품 배경까지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고도'를 위한 '기다림'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었더라고요.

이 자리에서 인간은 일단 자신의 '내던져짐'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음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Angst)'해하며,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지기 때문에 항상 염려(Sorge)하지요.이 불안과 염려는 일찍이 파스칼이 《팡세》의 제 1부, <신 없는 인간>에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두려움과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베케트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텅 빈 무대'위에 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 처럼 '무의미한 시공간' 안에 '성격 없는 인물' 로 구성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 그럼으로써 모든 문제는 대본도 성격도 없는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로 넘겨져 버렸습니다. 한번 무대에 오른 배우는 아무리 무대가 비었더라도, 설사 대본이 없더라도, 그가 무대에 서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지요. 연극이 끝나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까지는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p174-


이 책의 장점은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명작들의 의의를 당시 역사나 사상의 조류를 함께 설명하면서 당시 맥락에서는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결과 였음을 자연스럽게 인식시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에 바빠도,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에게 느닷없이 내려진 삶의 의미를 한번이라도 궁금해 하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따라 읽어가면서 아하! 하고 무릎을 칠 수 있게요.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려내는 일상 속의 미로에 매료된 것처럼, 제가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다면 이 작품을 읽고 단번에 공감했겠구나..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철학과 문학 이야기, 이 정도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 아닐까요?
목차만 봐도 <파우스트><데미안><구토><고도를 기다리며> 등 누구나 제목 한번 쯤은 들어보았을만한 세계 문학사를 수놓은 명작들을 소재로 하여, 그 작품이 왜 유명한지, 철학사적 측면에서의 의의는 무엇인지,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영향받은 다른 작품 들은 무엇이 있는지 등이 상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철학'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학습화된(!) 거부감은 잊고
소설책 읽듯 부담없이 집어드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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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세 번째 소년의 이야기 - 「나......의 아름다운......정원」 by 심윤경

서재
나의 아름다운 정원 - 10점
심윤경 지음/한겨레출판


지혜란 이토록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던가. 나는 선생님이 알려주신 말들을 입 속에서 되뇌어 보았다. 당신 고생하는 거 내가 다 알아.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어머니가 당신을 속상하게 하더라도 당신이 참아둬. 난 당신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워. 아버지는 이런 '사랑의 힘'을 전혀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오랜 세월 벽을 보며 정진했어도 도를 얻지 못하다가, 어느 여름날 대낮에 벼락과 소나기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후 대추나무잎 끝에서 돌절구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면서 갑자기 도를 깨달은 스님처럼, 가슴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환희에 벅찬 숨을 들이 마셨다.
                         
                                                                                                                                                  -p116-



인왕산 아래에서 자랐던 작가의 체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하지만, 나의 유년시절과 일치하는 부분은 전혀 ! 없었다.
탱크가 인왕산 자락에 장승처럼 서있던 역사적 배경은 차치하고서라도, 욕쟁이 할머니, 무뚝뚝한 아버지, 요리솜씨 뛰어난 자상한 엄마, 그리고 야무지고 귀여운 여동생이라는 가족구성에 이르기까지. 아마 줄거리만 놓고 보면 나는 또 80년 대를 다룬 그렇고 그런 소설 중 하나 겠거니, 하고 책장 한 구석에 밀어놓고는 또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으며 내가 몇 번이고 수긍했던 이유는,
그런 배경이 문제가 되지 않을만큼 작가는 보편적인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구네는 지금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집이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끝없는 악다구니에 시달리고,오랜 시달림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윽박지르고..
어떤가, 한줄짜리 요약에서도 눈 앞에 선히 그려지는 광경이 아닌가? 
TV 에서, 동네에서,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그러나 이러한 '평범함' 뒤에 감춰져 있는 진실이 동생 영주의 죽음을 불러올 줄은 아무도 몰랐기에, 
이 문제는 흔하다는 이유로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침묵하는 것도 유죄라고.
소리 지르고 싸우는 당사자들은 다들 어쩔수 없다고만 할뿐, 그 누구도 갈등의 근원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문제와 당면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미루어 둔 것은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 그런 식으로 미룬 모든 것들은 나중에 와선 '어쩔 수 없는 일' 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만들어진 당연한 '일상' 이 가져온 비극.


영주는 우리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애정표현이 자유롭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벌리는 팔과 그 아이가 내미는 입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웃지도, 이야기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신호등이 고장난 네 갈래 길에 각각 서있는 당황한 사람들처럼 서로 말을 걸거나 상대바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채 우두커니 서로 바라만 보게 되었다. 우리의 소통이 엉키지 않도록 요술같은 방법으로 누군가는 기다리게 하고, 누군가는 직진하게 하고, 누군가는 좌회전 하도록 지도하던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 교차로를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p273




영주의 죽음으로 더욱 악화된 집안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동구는 결단을 내린다.
매일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고 세상을 욕하고 엄마를 구박하는 할머니, 이제는 늙고 미래가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에게 희망을.
할머니와 함께 노루너미에 가서 살겠다는 동구의 선언은 사실, 인내와 헌신으로 가족을 감싸안은 또 다른 요술이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좋아하지도 않는 할머니와 함께. 외지에서. 엄마없이 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언제가 되어야 그 어린 가슴이 겪었을 숱한 고민과 희생이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을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작게 숨을 들이마신 후 , 나는 조금 울었다.




덧1> 작가 후기에서, 심윤경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세번째 소년의 이름이 '동구'였다고 말한다
덧2> 성격도 취향도 전혀 다른 나의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해준 작가가 바로 심윤경씨.
       <이현의 연애>보다는 이 작품이 더 작가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따스하고, 정겹고, 고향같은 사랑스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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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보통의 존재 by 이석원

서재
보통의 존재 - 10점
이석원 지음/달


 
솔직히 나는 이석원이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 그의 이름을 안 지는 오래 되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그는 정말이지 '아티스트'다운 행보를 보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정도로 포지셔닝 되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인디밴드의 보컬이자 프로듀서이고,
인사동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던 가게의 주인장이기도 했고,
심지어 요즘은 영화까지 찍을 기세인 잘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뮤지션'이라는 그의 직업도 직업이지만 '이석원', 그 에게는 분명히, 뭔가, 확실하게 특별한 것이 있나보다-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 그가 「보통의 존재」 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들고 내게 다가왔을 때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잘 나가는 그가 '보통의 존재' 라고? 그럼 나는 보통 이하의 존재인가? 하는 자조도 조금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안고 책장을 폈을 때.
내 눈 앞으로 뛰어들어온 한 구절에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
감정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왜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면 그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허망함이 밀려오는 걸까.
왜 그것을 입에 담는 순간, 그토록 복잡한 생각이 들며 나의 말의 진위가
내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지는 걸까.

-p140


언제나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미안해서, 혹은 두려워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말들이 이 노란 책 사이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는 보는 사람이 아플정도로 비수같은 말들을 '독백' 이란 이름으로 내리 꽂는다.
아니,그는 그저 담담히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내가 지레 찔리는 것 일 수도 있다.
숨겨왔던 진실. 풀리지 않는 오해. 끝나지 않는 가식. 영원을 맹세하는 거짓.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이라는 이름의 어둠과 무게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수건돌리기'만 해도 그렇다.
"술래가 원을 그린 채 앉아있는 아이들 뒤를 빙글빙글 돌다가 살짝 누군가의 등 뒤에 수건을 놓고 달아나면 당사자는 황급히 일어나 술래를 쫒지만 원망의 미소를 던지면서도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반면 한번도 선택되지 않은 아이는 박수치고 노래를 하며 기다려 보지만 게임이 끝날 때가 가까워질 수록 초조해짐을 느낀다.(..)
내가 우리 사회의 이러한 강요된 관계맺기 문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어떨 땐 너무나 숨이 막힌다."
라니.
어릴 때 내가 느꼈던 미묘한 기분. 놀이를 하고 있어도 강요받고 있는 것 같은 질척한 그 기분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던가.
또한 그는 '친구'라는 글에서 대뜸 묻는다. '정말 친한 친구의 슬픔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것은 오히려 쉽다.하지만 바로 그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때도 정말 내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을까?'  이석원은 단언한다. "세상에는 그 둘 중 하나밖에 해줄 수 없는 우정이 훨씬 더 많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렵다" 고. 비록 자신이 건네는 축하의 90% 는 진심일지 몰라도, 10% 섞인 질시의 감정을 없애는 것은 어렵다고 말이다. '보통의 존재'라면 누구나.

어렵게 찾은 그의 블로그 첫 머리에는 딱 두 줄짜리, '출간 두 달'이라는 포스팅이 있다.

" 늘 즐겨가는 서점에서 습관처럼 베스트셀러 코너를 보며 희망과 긍정을 부르짖는 저 수많은 책들로부터는
  결코 한줌의 위로도 받은적이 없음을 깨닫고 어딘가 있을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뭔가를 쓰고 싶었다."

사랑에 아프고, 가족에게 상처받고, 관계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속박을 지겨워하면서 다른 대안은 찾지 못하고,세상의 잣대에 고통스러워하고, 어느날 문득 어린시절에 믿었던 것처럼 자신이 천재도 수재도 아니라 '보통의 존재'라는 섬뜩한 자각에 진저리치다가도
그저 그런가 보다, 이게 삶인가 보다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아마도 이 책은, 구원은 아닐지언정 그가 말한 한 줌의 위로가 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그리고 단 한번도, 누구에게도 차마 해 보지 못한 내 안의 가장 내밀한 고백.
그런 것들에 대해 나에게 먼저 말 걸어 주는 이석원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난 나만의 행운일 거라고, 그렇게 나는 이 책을 또 한 번의 위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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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강 너머가 아닌, 이 자리의 희망- 「공무도하 公無渡河」by 김훈

서재

공무도하

김훈저 | 2009.10.08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선생님,




저는 아주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왔습니다.
'죽음'이란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이자 의식이고,한 인간의 연속적인 일상의 종말입니다.따라서 인간이라면, 혹은 생물이라면 누군들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냐만은 제가 죽음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의 근원은 제 삶의 종지부와는 관계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후에, 남겨진다는 것.

절대적인 힘에 의해 나의 분신과 외따로 떨어져 마치 의무와 같은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는 항상 두려웠습니다. 그의 부재(不在)와 관계없이 여전히 무심하게 돌아갈 세계(世界) , 분리의 최초 시점에만 헛바퀴 돌듯 비틀거리다 중력권에 진입한 위성처럼 또 다른 궤도에서 안정될 것이 분명한 나의 일상(日常). 아직 스치듯 지나간 적도 없건만, 그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언제나 저를 아프게 만들었습니다.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잊어간다는 현실이. 또한 그 현실을 불러일으킬 '죽음'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그리고 그 권력은 작품의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가장 크고 넓은 강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삶의 무게추와도 같았던 자식을 강의 '저 편'으로 보내고, '이 편'에 남겨진 방천석과 오금자.
몇날 몇일을 오열하다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그들은 묵묵합니다. 딸의 장례식장에서 문정수에게 무심히 몇 마디를 대답이랍시고 내놓는 방천석이나 자식의 죽음을 들이대는 세상을 피해 깊숙히 숨어버리는 오금자의 모습은, 분신을 잃은 인간적 슬픔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일순간 박탈당한 이재민의 체념섞인 한(恨)과 더 닮아 있습니다.
 "인연은 풀려서 흩어졌다.그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다.부재하는 것들의 한시적 응집일 뿐이었다.자궁은 증발하고 혈연은 해체되었다.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선생님, 저는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기체가 아니라 흙과 먼지로 이루어진 부유물에 더 가깝습니다. 두 발을 디딘다는 의미도 알지 못한체, 물결에 휩쓸려 목적없이 떠도는-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그런 흙덩어리에 기적적으로 새싹이 움터 하늘을 향해 뻗는 시절이 있다 해도, 그 싹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리면 그것은 결국 최초의 흙덩어리 이상의 의미는 가질 수 없는 존재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지금 떠돌고 있는 장소에 한 때 그의 새싹이었던 생명에 대해,생명을 품고 있던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타자(他者)가 아무도 없다면 그저 흙덩어리가 아니었던 그 시간이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무가치한' 상태를 다시 깨닫는 것.그것이 '이 편'에 남겨진 이들에게 죽음이 내린 형벌이자 아픔의 이유입니다.

허나, 이렇게 명백한 이유가 있는 이들과는 달리 문정식의 아픔은 처음엔 그 근원을 추측하기도 어려웠습니다.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분명히 '죽음'은 아닙니다. 박옥출과 방천석과 오금자를 이야기할 때 그의 어조에 드리운 그늘은 짙고도 스산하리만큼 쓸쓸했지만, 저는 그것이 그저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해.막막하고."라고 대답했을 때, 저는 '소리굽쇠'를 떠올렸습니다. 다른 소리굽쇠의 울림에 공명하여 자신을 울리는 참 가련한 운명을 지닌 도구. 문정식 또한 어떤 점에서는 같은 운명을 가진 동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소리굽쇠의 사명은 공명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사명은 고독입니다.아무리 화답하듯 웅웅대보았자 그 소리의 진원은 자신이 아닌 타인입니다.내가 아닌 타인이, 고통을 포옹하고 삭이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시간과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도 '나의 현실'과 '그의 현실'은 엄연히 별개이며 서로의 현실이 포개어 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개인의 일상과 일상이 맞부딪치는 공간에서의 떨칠 수 없는 상대와의 거리감.. 그래서 '면접자'와 '피면접자'의 관계에서 업무를 시작하는 기자라는 직업은  참 외롭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사건의 당사자에 대해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정작 원고를 송고한 후에는 다시 자신의 '현실'을 되찾습니다. 불 속에서 귀금속을 챙겨나온 전직 소방관이나 개에 물려죽은 아이의 어머니와는 백만광년 쯤 떨어진, 전화기 너머에서 '김밥''오징어튀김''국물'과 같은 단어가 전하는 확실한 자신의 현실.근거. 그런 것들이 아직 자신의 곁에 존재하는 한, 자신과 관련이 없는 모든 일들은 사실 노목희의 말처럼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대응책일 지도 모릅니다.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다"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람이 '혼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혼자이기 때문에 슬프고 혼자가 아니기 위해 행하는 일들이 모여 세상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개인의 한숨과 아픔이 모여 이렇게 어지러운 삶이 되지 않았을까요.
이런 모든 것들에도 굴하지 않고 그래도 우리 여기서 '함께 살자'고 하셨다지만, 저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소시민 중 하나이기에 자꾸만 저 강 건너 피안의 장소가 작은 희망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을 '여기서' 보낼 수 있는 것은, 하루를 채우는 고마운 이들의 덕택일 겁니다. 누군가에게서 전적으로 이해받는 다거나 완전하게 사랑받는 것을 꿈꾸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제 곁에 머물러 주는 이들에 대한 감사.비록 '영원'한 머무름은 없지만-나의 현실로 걸어들어온 사람들이 다시 나간다해도 그렇게 이어지는 순간순간이 결국 '삶'이라는 이름의 시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야근 너무 많이 하지마. 이제 새벽에 갈 데도 없잖아.
-그래 잘 가. 빨리 타.

가볍고 무심하게 안녕을 고하는 어제까지의 현실을,자신만의 관계(關係)를 이국으로 보내고 서울 동남경찰서를 향하는 문정식에게도, 그리고 앞으로의 저에게도 따스한 오늘이 마주하는 순간이 계속 , 쉼없이 이어지는 행운이 있기를, 하고, 책장을 덮으며 기원합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혼자인 이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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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그저,사랑이라는데-「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by 박민규

서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8점
박민규 지음/예담


아마도 내 인생의,가장 행복한 겨울이었을 것이다.무엇을 해줄까,어떤 표정을 지을까..그런 보잘것 없는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純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인가.알 수 없다.

-p 192-


한 때 나는 평생 사랑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더 그랬는지, 돌이켜보면 내 스무 살의 사랑은, 최초의 'why?' 에 대한 답 조차 없는
한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사랑이었다.
잘생겨서, 혹은 키가 커서, 머리가 좋아서,.. 등등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그 수백 가지 이유 들 중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있어, 내 사랑의 전제는 '그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호감(好感)'이었기 때문에, 달콤하게 심장을 간지럽히는 듯한 두근거림도 찌르는듯한 아픔도 모두 그 최초의 전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성별의, 인간의 범주를 넘어 한 생물로서 다른 생물에게 가지게 된 그 몸떨리는 그리움과 애틋함-어떻게 거기에 이유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또 다른 스무 살의 사랑과 만난다.
'그'는-
어머니를 떠나 간 그의 아버지를 기억한다.결국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자신도 아름다웠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고 '그녀'.
자신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더 아름답기에 평생 '그림자'로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스무 살의 여자.
결국 두 사람을 잇는 것은 '美'라는 세상의 보편적인 미덕이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시시한 그 인간을,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시간이 지나도 시시해 지지 않게 미리,상상해 주는 거야.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지디 못해.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시시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함께 있는 그들은 다른 여느 콩깍지 씐 연인들과 마찬가지로-대책없이 강력하다. 아마 한국 최초, 아니 세계 최초로 '못생긴'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떤가.요한의 말처럼,인간은 미녀에게도 추녀에게도 금방 질려버리는데.그러니까 작가는 결국 , '못생긴'여자가 아니라 어쨌든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다. 서로의 상상력으로 서로를 완전해지게 하는- 마치 'Origin of love'의 태양과 달과 땅의 아이들처럼 이끌리듯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그리고 서로가 사랑한 기억으로 남은 생의 희망을 밝히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누가 '서로에게 한 순간 강렬히 열중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라고 했던가. 아니, 대체 외로워서 하는 사랑이 뭐 어떻단 말인가. 외로워서 하는 사랑도 사랑이고, 부족해서 하는 사랑도 사랑이고,심지어 세상엔 배고픔에 지쳐 덤벼드는 사랑도 있다는데.온 몸을 던지고픈 사랑에는 단지 계기가 있을 뿐, 이유는 없다.충만해 지기에 '혼자'서는 모자라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자신이 가진 퍼즐의 한 조각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사랑은 시작된 것이다.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건,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건 간에.

그러니까 사실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어지는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사랑 노래에 그만 덮어버릴까도 수없이 고민했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등장하는 지 꼭 한번 세어보고 싶어지는 이 책은 다행히' 꽤' 재밌다.
몰입을 방해하는 구성과 난해한 묘사 등은 분명한 감점요인이지만,그럼에도 편을 들어주고 싶은 것은 내가 지금 사랑에 고프기 때문인지,외롭기 때문인지,혹은 가을이기 때문인지..(..)
어쨌든, 80년 대의 추억과 손잡고 얼굴 붉히는 어린 사랑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립고 부러운 사람이라면 이 가을, 꼭 한번 두 연인을 만나보는 게 어떠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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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그의 행복엔 이유가 있다 -「땡큐! 스타벅스」by 마이클 게이츠

서재
땡큐! 스타벅스 - 6점
마이클 게이츠 길 지음, 이수정 옮김/세종서적


나는 보통 서점에 앉아 책 한권을 일독하는 '무례'한-이것은 서점에 대한 무례가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내 기준에서의 책에 대한 무례임을 먼저 밝힌다.나는 좋은 책은 무조건!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전신으로 몰입하여 읽어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은 하지 않지만, 이 책은 어쩌다보니, 정말 의도치 않게 책을 넘긴 그 자리에 서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시작은 이랬다.제목에서 부터 스타벅스의 홍보성 글이 아닐까,영화화가 된다니 스타벅스는 과연 얼마만큼의 브랜드 가치를 구축할 수 있을까,아이 엠 샘의 두번째 시리즈 정도일까?라고 생각한 나는 누가 쓴건지나 보자라는 시큰둥한 마음이었다.그런데 머릿말을 먼저 읽다보니, 이 책을 쓴 마이클 게이츠라는 이 분,다국적 광고회사의 이사직 까지 역임하신 분이란다.그리고 스타벅스에서 일하기 시작한 나이는 53세.그때 그의 최고 상사는 28살의 점장 크리스털 이었다.

크리스털은 스타벅스 카운터를 넘어가려는, 라떼를 마시던 손님에서 라떼를 접대하는 직원이 되려는 내 의지의 진실성만큼은 알아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배워나가야 할 것과 깨나가야 할 편견이 내게 너무 많다는 느낌도 받았으리라. 그럼에도 모험을 감수하고 계층과 인종과 성별을 뛰어넘어 내게 일자리를 주려는 의지를 보이는 그녀가 고마웠다.

                                                                                                                                 -p43-

사실,이 책은 주인공이 모든 걸 잃은 50대 중년 남성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의 스타벅스 도전기'라고도 할 수 있다.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화장실 청소를 처음 하게된 마이클 씨는 첫날의 당혹감부터 시작해서 카운터 업무,커피 만들기,영업 개점 및 마감 까지 스타벅스의 매장 운영에 대한 자잘한 사항까지 열심히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이다.그래서 만약 한번도 매장경험이 없거나 / 사무직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그가 느낀 모든 감동과 놀라움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엔,비록 몇 개월 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장-사무실-매장-사무실을 반복하여 근무한 경험이 있기에,특히 그가 정말이지 '신기하다'고 서술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 손에 잡힐만큼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매장  첫 출근 날,점장님의 한 마디가 아직까지 기억난다.
'여기서는 어려운 건 아무것도 없어요.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가 만들어 줄게요.그 다음에는 당신이,다음 사람을 새로운 당신으로 만들어줘요.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걸 아까워하지 말고,함께 잘해야 모두가 편하다는 걸 꼭 기억해요.'
그리고 점장님은 정말 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셨다-_-
매장에서도 그랬다.주말에 아르바이트 하던 스무살짜리 가수 지망생 아이는,케익 포장을 가르쳐 주었고,평일 마감을 맡은 아이는 아이스크림 예쁘게 담는 법을,동갑인 매니저는 카운터 업무를 가르쳐 주었다.모두가 모두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모르면 배우려고 하는 자세로 일했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도 할 수 있어야 한다''남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매장에서의 운영 프로세스는 거의 매뉴얼화 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하지만,사무실에서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하고,되도록 숨기려 하던 사수와, 배우려고 할 수록 점점 멀어지는 동료들에게 치였던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매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쁨과 보람도 있다.
매일 아침 라떼를 사가는 단골 손님에게 몰래 신제품 쿠키를 드리거나,갓 만든 커피가 '맛있다'는 칭찬을 들을 때,그저 해야 할일을 했을 뿐인데 밝은 미소가 돌아올 때 느끼는 벅찬 감동-
마케팅 보고서나 데이터 위에서가 아니라 정말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나고 있다는 실감은,
사무실에서 몇 시간씩 키보드를 두드릴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그러니까 굳이 이 책의 추천사에 태클을 거는 건 아니지만,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물론 스타벅스의 기업문화가 좋은 까닭도 있지만,마이클 씨가 느낀 감동은 사무직에서 있다가 현장 경험을 처음 해 보았기 때문에 더 컸던 부분도 있을 것이라는 거다.같은 비전과 미션을 가진 조직 안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이라고는 해도,결국은 하나 하나가 자신의 커리어와 연봉을 위해서 각개전투를 벌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회사'라면, 매출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장, 즉 매장은 정말 모든 구성원이 '팀 TEAM'으로 일한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다. 좋은 리더가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서로가 서로를 돕는 다는 것,너무나 당연한 원칙인데도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게 뻗어온 도움을 받았을 때 느끼는 그 따스함과 뭉클한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의미를 '낮은 곳에서도 행복은 있다'라고 받아들인다면,그것은 딱 흔한 자기 계발서를 한권 더 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그러나 만약 '모든 일에는 각각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그 가치를 더할 수도,혹은 감할 수도 있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 만이 줄 수 있는 교훈까지 합하여 더 큰 성찰을 찾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털은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나누었다. “아버님은 아주 잘해주고 계세요.” 크리스털이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으시죠. 우리는 아버님과 함께 일하는 게 즐겁답니다.” 로라와 다른 아이들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도 아이들은 내가 오만한 독불장군처럼 굴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람들하고 어울려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을지도…….

                                                                                                                           -p261-


어쨌든 이렇게 스타벅스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여 즐겁게 일하게 되신 마이클 씨가 어떻게 되셨나 하면,
지하철로 1시간 이상 걸리던 뉴욕 중심가의 매장에서 이동하여 집 근처의 매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고 한다. 몸이 힘든 일일 수록 마음이 편하다는 우리 아버지의 지론대로라면, 그는 잘 나가는 회사 중역이었을 때보다도 더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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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함께 걷는 이 길이 끝나면...「밤의 피크닉」 by 온다 리쿠

서재
밤의 피크닉 - 8점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북폴리오

"그러니까 말이지, 타이밍이야."
시노부는 나직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빨리 훌륭한 어른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고 싶다,홀로서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건 잘 알아.굳이 잡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아프리만큼 알지만 말이야.물론 너의 그런 점,나는 존경하기도 해.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거야.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때가 있는 거야.네게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p156-


모두 함께 밤에 걷는다.단지 그것 뿐인데 말야.
어째서 그것 뿐인 것이, 이렇게 특별한 걸까.

돌이켜보면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인것만 같은데,벌써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것에 문득 놀라곤 합니다.그 때의 저는 어땠었냐면, 상당히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잡음이 들리지 않도록 완벽히 방음된 환경에서 다만 앞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오르고,올라서,그 다음에는?
나는 지금도 여기 분명히 살아있는데,웃고 떠들고 고민하고 한숨쉬는 10대의 내 인생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나의 진정한 인생의 시작은 대학 입학 이후라고 말하는 듯한 주위의 시선과 그에 동조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 의연한 척 앉아 있는 것이 내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습니다.물론, 그 와중에도 즐겁고 신나는 일은 가득 있어서 지금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온통 빛으로 가득찬 듯한 이미지로 모든 풍경이 특별히 제작된 물감으로 그린 듯 선명하고 또렷한 광채를 뿜는 듯한 장면이 하나씩 떠오르지만 말입니다.그래도 저는 이 책,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읽고, 아아 이 책을 좀더 빨리 읽었더라면..하다못해 대학 신입생 시절에라도 읽었더라면,하고 마음 깊이 후회했습니다.그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아마도 좀더 너그러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쯤 용서해 줄 수 있었을 것 같은 기분.

힘들다.멈추고 싶다.걷고 싶다.
머릿 속으로 외친다.아니, 외친다느니 하는 기세 좋은 것이 아니라,그저 고장 난 레코드처럼 저주가 되풀이 하여 울리고 있다고 하는 쪽이 옳다.몸은 이미 옛날 부터 죽는 소리를 하고 있다.평소의 기준으로 말하면 완전히 은퇴한 상태인데,지금은 타성과 체념으로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잠깐의 수면으로 체력이 돌아올리도 없으려니와,수면은 피로를 마비시켜 아직 괜찮다고 믿도록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건,계속 되지 않는다.
다리는 무거워서 조금도 올라가지 않는다.간신히 앞으로 내밀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고통과도 비슷한 피로가 전신에 둔하게 울린다.
-p246-

그러고보니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은 후 1년 쯤 후에,이와 상당히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입사 후에 이어지는 타이트한 스케쥴의 교육,그리고 그,제겐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연수 마지막 주의 50km 행군.
사실대로 말하자면,저의 느긋한 성격치고는 꽤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온 회사였지만 연수원에서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해,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슷한 학습내용,앵무새같은 이상론,조직이 원하는 몰개성한 구성원..에 질려 정말이지 오늘에야말로 뛰쳐나가겠다고 이를 악물던 무렵이었습니다.그래도 책에서 읽은 '밤새 걷기'를 타의로라도 해보게 되었다는 것에 나름 의미를 부여하고,조금 떨리는 마음도 있었지요.
배운대로 양말을 겹쳐 신고,잘 길들인 등산화를 단단히 매면서 생각했습니다.그저 한걸음,한 발씩 내딛고 내딛다 보면 다시 돌아오겠지.나의 한 걸음이 50km로 뻗어나가는 거야.고작 그것 뿐인걸.밤이 길다고 겁먹지 말자.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을거야-
물론,괜찮지 않았습니다.
오후 3시쯤 출발한 행군이 밤 12시를 넘어가면서 딱 맞는 등산화 안에서 발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오르고,여기저기 물집이 생기고,다리를 들어올리는 것 조차 고역이라 '아아,인간이 다리를 굽히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동물이었으면!'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습니다.조원들이 돌아가며 부축해 주었지만 이게 끝인가.여기서 포기할까.하지만 그럴 수 없는데-라는 의지와 포기하는 심정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 발걸음을 흔들리게 하고,이제 끝이다,싶을 때 쯤 다시 나타난 연수원의 풍경에 기어이 뿌옇게 흐려지던 시야.이런 것들이 저의 '밤새 걷기'에 대한 기억입니다.아마,'밤의 피크닉'속의 그들과 고통의 차이는 거의 없었겠지만,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약 내가 3년을 함께 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했더라면 그 날에 대한 나의 기억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좀더 많은 이야기를,하릴없이 지나쳐가는 일상 속에서는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도 하고,이런 상황에서도 따스한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을텐데.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진 그 밤의 긴 여정 속에서 보았던 고요한 숲의 느낌이나 쏟아질듯한 별빛,그리고 같은 고민을 가진 동기들과의 대화-는 그나마 좋았지만,그래도 더 좋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으로,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립니다.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1미터 걷는 것 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 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분 일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 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농밀하며 눈 깜짝할 사이였던 이번 한 해며,불과 얼마 전 입학한 것 같은 고교 생활이며,어쩌면 앞으로의 일생 역시 그런 '믿을 수 없는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아마 몇 년쯤 흐른 뒤에도 역시 같은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어째서 뒤돌아 보았을 때는 순간인걸까.
그 세월이 정말로 같은 일분 일초마다 전부 연속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하고.

-p224-

돌이켜보면 순간인 것 같다가도,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뒤돌아보면 한없이 아득하기만 한 시절.
오늘의 나도 내일의 어느 순간엔 이렇게 멀고 그리운 존재가 되어있겠지요.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어영부영 부실하게 보내고 만 것에 대한 후회는 들지 않으니 큰 일입니다.
그래도-방음이 잘 된 공간도,깨끗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정원도 좋지만 저는 역시,가끔은 잡음이 끼어드는 생활이 좋습니다.죽을만큼 고민을 하고,수도 없이 한숨을 쉬고,풀 죽은 채로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어깨를 툭 쳐줄 사람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제 삶이란,어쩌면 발바닥을 찌르는 아픔을 참으며 끝도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다카코나 토오루와 다를 바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그 들이 그 길의 끝에서 얻어낸 것을 저도 이 길의 어디에선가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끝까지 품에 안은 채 걸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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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안녕,고양이는 고마웠어요」

서재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8점
이용한 지음/북폴리오


어느 날 고양이가 나에게 왔다. 달빛이 휘영청 골목을 비추던 밤이었다.버려진 은갈색 소파에 어미 고양이 한 마리가 아기 고양이 다섯마리와 함께 앉아있었다.하필이면 내가 사는 집 앞에서 나는 그들을 보았다.
달빛 속에서 파란 눈을 깜박이며 어미 품을 파고들던  다섯 마리의 아기 고양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들오들 떨면서 "제발 우리를 해치지 말아요!"라고 말하던 그 눈빛!

-p 21-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꽤 극적인 부분이 있으나,나는 항상 사람과 고양이의 최초의 만남도 그 어떤 생명체도 겪어보지 못한 극적인 상황에서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위협적인 표범이나 호랑이의 미니 사이즈 같은 생물체가 처음 두 발로 걷는 인간이라는 종족을 만났을 때,
과연 그들은 하악질을 해댔을 것인가?아니면 특기인 빠른 발로 풀숲에 숨어들었을 것인가?
도대체 언제,어디서부터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어떤' 사람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양이라는 생물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 '길고양이 에세이'의 저자가 그 역사적인 첫 만남의 순간에 느꼈을 환희 비슷한 감정을 십분 이해한다.
(물론,최초의 순간에 느꼈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거나 퇴색하곤 한다.
 이 경우에는, 천사같았던 어린 아들이 사춘기 반항아가 되었을 때 느끼는 회한과도 좀 닮아있지 않을까?)


그날 이후 내 머릿 속에는 이따금 소파도 아닌 곳에 고양이 여섯 마리가 오종종 앉아있곤 했다. 그동안 나는 고양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좋거나 싫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다. 그저 고양이는 관심밖에서 살아가는,나와 상관없는 동물일 뿐이었다.그러나 그날의 강렬한 기억은 마법처럼 나를 고양이의 세계로 인도했다.

-p22-

그렇게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혹은 고양이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길가다 지나가는 고양이에 반응하게 되고 고양이 언어를 배우려하고 고양이에 대해 알게되어버린 저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길고양이 '님'에게서 사진촬영을 '허락'받게 되었다고 한다.사실, 이 책 안에 실린 수많은 고양이들은 당장이라도 CF에 등장해도 될법한 TV속의 고양이는 절대!아니다.길을 가다 어디서나 볼수 있을만한,정말 흔하디흔한 길고양이들.동네 공터나 아파트 풀밭에서 뒹굴면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는 길 위의 고양이들.
어떤 사진에는 그네들의 처연한 삶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하는 반면에,흙 묻은 앞발로 그루밍을 하고 사료로 드리블을 하며 장난치는 모습은 또 너무도 고양이 다워서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한다.
배고파서 휴지까지 먹다가 '휴지냥'이 된 녀석이나,꽃구경을 좋아하는 희봉이,툭하면 영역을 벗어나 세탁소까지 구걸하러 오는 '동냥이'..
사람인들 사연없는 이가 하나라도 있겠냐만은, 각 장마다 펼쳐지는-풀밭을 베게삼아 바람을 이불삼아 추운 겨울날에도 어두운 지하실이나 덤불속에서 하루를 지새야 하는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웃다가 울다가 공감하다 보면 어느새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갑작스러운 이사 결정으로 동네 고양이들과 헤어지게 된 저자는 인사를 하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니지만,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어떤 고양이도 안보였다고.결국 인사없이 정든 동네를 떠나오게된 저자이지만, 밥 주는 사람이 줄어든 고양이들이 어떻게 지낼 수 있을 지, 끝까지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아마, 장과 장 사이 마다 짤막하니 써 넣은 글귀가 그의, 그리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길 위의 고단한 삶을 사는 어린 고양이를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겨울은 고양이에게 특히나 힘든 계절인데.오늘도 먹이를 찾아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이름모를 길고양이를 생각했다.내일은 사료캔을 좀 챙겨두어야지.




버려진 고양이가 있다면 친구가 되어 주세요.
다친 고양이가 있다면 핥아주세요.
도둑 고양이라고 놀림당한 고양이의 등을 토닥여주세요.
먹이 구하는데 실패한 고양이에게 어깨를 빌려주세요.
내일 먼길 떠나는 고양이를 위로해 주세요.
엄마 잃은 아기 고양이의 눈물을 닦아 주세요.
지금 내 곁에 있는 고양이를 꼭 안아주세요.
한번 더 안아주고 만져주세요.
한번 더 '야옹'하고 '갸르릉'해주세요.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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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발자욱-「무지개」by 요시모토 바나나

서재
무지개 - 8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행복이라는 형태가 좀처럼 없다고 생각해왔다.
어릴 때부터 손님을 대하는 장사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배운 것이다.
삶에는 엇갈림과 슬픔과 고요한 행복만이,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거푸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는 간혹 꿀 같은 순간이 있다.
어린 시절의 놀이처럼 잘못은 없지만 격렬하고,
영원히 그 호박색에 갇힐 듯 격정적인 달콤한 순간.


-p21-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여성스러운 강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이 아니라
거센 폭풍우를 끌어안을 줄 아는 너그러움이랄까,
어떤 과오를 저지르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보듬듯
상대방을, 나를 따스하게 끌어안아 줄 것 같은 상냥함.
그것이 아마 그 사람의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인간과 생물,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뒷받침 되어야만 실천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진
순수하고, 강하고, 사랑스러운 그녀들의 모습에
저는 항상 위로받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각오를 다지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요즘은 꽤 많이..지쳐있었습니다.
줄지 않은 일들 속에서 이어지는 소득없는 고민, 갈등과 회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날마다 실감하면서 제발, 여기가 아닌 어디론가,
내가 있었던 장소로-혹은 내가 있어야 할 장소로 나를 데려다 달라고,
매일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저는,
요시모토 바나나 입니다.


이루기 힘든 사랑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좋아하는 직장을 떠난 허전함.
그런 것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쓰러져버리고 만 에이코는
맑고 따스한 타히티의 해변 아래서 예쁜 레몬색의 상어를 봅니다.


그리고. 요즘 내가 무엇에 매달려 있었는지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것은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살아가기 위해서는, 담담하게 일하고, 들뜨지 말고, 복잡하고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도 말고,
자기 발이 딛고 있는 땅을 찬찬히 내려다 보면서 걸어갈 것.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왈과 자연의 힘에서 얻은 행복과 즐거운 기억을 잊지 말 것...
눈을 감고 흔들리는 그 생각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너무 필사적이었던 탓에,당연하게 그저 거기에 있는 부드러운 것, 자신의 너그러움과 유연한 마음으로 부터 나도 모르는 새 벗어나고 말았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에이코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오면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매출이라던지 데이터라던지 기획이라던지 그런것들은 사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나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 지,
그리고 내일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삶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말입니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의 단단함을 느끼면서 하루를 담담하게 일하고 매일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사회인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그저 하나의 생물로서 살아간다면 좀더 행복해 지지 않을까..

저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을 경외하며 고요한 행복 속에서 찬미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타히티에서 돌아온 에이코처럼
그런 삶을 함께 해줄 사람이 있다면 ,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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