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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기나긴 밤이 빛의 바다로 침몰하는 순간, <7년의 밤> by 정유정

ENJOYMENT/BOOK 2011/08/13 22:00
7년의 밤 - 10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


"내 아버지는 살인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는, 그의 아버지가 일가족 4명이 즉사한 교통 사고의 가해자였다고 담담히 털어놓았다.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했고, 그래서 술에 젖어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직 어렸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죄책감'이라는게 무엇인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해했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는 살인자이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쉬이 슬퍼할 수 없다는 것만은 알았다고.
 

'서원'과 함께 지새던-그 오랜<7년의 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나는 기억 어딘가에 묻어둔 그 소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는 휴대전화를 접어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은 '지난 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 이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 '그의 아들' 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열 두살이었다.                                                                        
 -p8


모든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들 외의 사람들에게 신경이 쓰였다.
섣불리 슬퍼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가해자의 유족들. 혹은, 불의의 사고로- 정말 '운명이 느닷없이 변화구를 던진 날'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하여. 누구나 그들에 대해 떠들어대지만 정작 아무도 알지는 못한다.
불합리 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 아닌 다음에야 어차피 '남의 일'일 텐데, 그저 타인일 뿐인 사람들이 추측하고, 이야기하고, 단정짓고 비난하거나 동정한다는 것이. 자신이 겪고있는 상처와 고통이 단지 '타인의 일'일 뿐인 다른 누군가의 유흥거리나 재밋거리가 되어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을만한 너덜한 누더기가 될 때까지 치여야한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힘겨운 나날이 계속 되고 있는데, 이야기 한번 나눠보지 않고 멋대로 자신의 아픔을 재단하고, 그에 따라 내키는대로 동정하거나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이 어떨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최현수와 최서원이 바로 그랬다. 영원히 지속될것만 같은 지옥 속에서 보낸, 기나긴 밤. 


그 아이는 어디서든, 무시로 튀어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모습이, "아빠"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왼손 밑에서 버둥거리던 몸부림의 감촉이, 누가 그 일을 저질렀는지 일깨우는 일은 매일 매순간 일어나고 있었다. 각성의 순간에는 미칠것 같고, 미칠것 같은 순간이 지나면 망연자실의 순간이 찾아 들었다. 그 순간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신에 대한. 미래에 대한,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데 대한, 부서진 삶을 다시는 복원할 수 없다는 데 대한 공포.
(..)

옳지 않았다. 공평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쥐 한마리 죽여본 적이 없었다.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간 적도 없고, 독 묻은 혀로  남의 등골을 빨아 먹은 적도 없었다. 거창한 소망을 바란 적도 없었다. 가족에게 세 끼 밥을 먹이고, 아들을 키우고, 내키면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딱 지금만큼의 행운을 바랐다. 그것이 그리도 주제넘은 바람이었더냐.
두려움 밑에서 깜박대던 분노가 불길로 타올라 소녀에게 옮겨붙었다. 대체 너는 누구더냐. 죽고 싶었다면 호수로 뛰어들었어야한다. 죽을 힘을 다해 버둥거린 끝에 유리공 하나를 손에 쥔 남자의 차가 아니고.                    -p121 



작가는 이 작품이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할 상황'이 생긴다. '그러나'는 온전히 한 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나'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으며, 따라서 불편하고 혼란스러워도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라고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그리고'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변화구가 던져진 다음, 체인지 후 다음 회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마운드 위에 선 신인 투수 최서원과, 명포수 최현수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평생 2군일줄만 알았던 남자가,그저 운명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는 것 처럼 보였던 한 남자가 마침내 승리한, 그런 이야기라고.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결과값이지만, 그건 아마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수식에 의하면 매우 당연한 '그리고'일거라고.
그런 '그리고'가 인간에게 드리운, 길고 짙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라고.
빛도 어둠도 없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만 계속 이어지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런 밤이 필요했을 지도 모르겠다.
너무- 크고-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는다.
빠져나오겠다는 생각마저 접게 만드는, 그 아득한 어둠과 고요를 상상한다. 

세령호의 짙은 물안개 속에 둘러싸인 한 마을을 생각한다. 
아직 작은 소년과 그의 아버지. 가늘고 새하얗던 소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얽히기 시작한 그들의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면을 엿본다.
탄식한다. 


'그리고' 어둠의 끝, 저 멀리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빛을 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한 걸음, 앞을 향해 발을 디뎠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다시 한 발짝.
나아갈수록 소리는 멀어졌다. 어둠은 차차 옅어졌다. 
마침내 환해졌다. 그 아이의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허공을 디디며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 아이의 흰 종아리를 보았다. 그 아이가 남긴 희미한 발자국 위로 잿빛 오후가 밀려왔다. 세상의 초침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아저씨의 봉고가 내 곁에 와서 섰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고 길었던 밤이 빛의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p517



      7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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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25 18:53 ADDR 수정/삭제 답글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elais.tistory.com BlogIcon Elyu 2011/08/26 00:46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메일로 말씀 주신 내용 회신드렸습니다 :-)